제2의 인생을 설계하는 후배들에게
Retire를 한다, 은퇴를 한다고 이야기들을 하는데 나는 이 삶을 제2의 인생을 산다고 이야기 하고 싶다. 우리는 누구나 젊은 시절에는 먹고 살고 삶을 윤택하게 하기 위하여 일을 한다. 직장을 다니거나, 자기 사업을 운영하거나, 공무원 ,의사, 변호사등 여러 모양으로 싫턴 좋턴 9 to 5의 삶을 산다.
그러다가 어느 때가 되면 자의건, 타의건 이 삶의 굴레에서 벗어 나는 삶을 살아가게 된다. 나는 직장인 으로써의 삶을 살아 왔고 Retirement는 먼 동경의, 그리고 해방된 삶의 소망 같은 것이었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먹고 50이라는 나이에 접어 들면서 은퇴 라는 것이 현실로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며 조금씩 불안한 마음이 생겨 났다. 언제쯤 은퇴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나이 일까? 내 소망 대로 그때 까지 버틸 수는 있을 까? 경제적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 갈 만큼 부를 축적 해 놓았는가? 이제는 100세 인생이라는데 그 긴 시간들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 건강은 어떻게 유지 해야 하며, 30여년의 긴 세월을 어떤 삶의 모양으로 살아가야 하는 걸까? 이러한 생각들이 스치며 지나갔고, 어떻게 답을 얻어야 할지 고민의 시작이 었고 주위에 상담 할 선배들도 없었다. 그래서 나는 55세의 나이부터 은퇴 공략을 설계하기 시작 했다.
첫째 고민은 경제적인 독립이었다. 얼마가 있어야 은퇴 할 수 있을까?
- 기본적인 삶을 살아가야 할 집이 있어야 겠고 : $ 500,000
- 자동차 : 30년간 매 5년 마다 교채 6 X 50,000 = $ 300,000
- 기본삶의 경비 : House Tax ( $ 5,000), + Utility ($6,000)+ Grocery ($ 12,000) + House Maintenances ($ 4,000) +자동차 Gas ( $ 2,500) + Insurance ( $ 2,500) = $ 32,000
- 외식 & 선물 : $ 10,000
- 사회기여 와 교회 : $ 7,500
- 여행 & 취미 생활 : $ 30,000
- Total 생활비 = $ 79,500 + Income Tax ( 10,500) = $ 90,000 ( Income from Gov: $ 31,200 + $ 58,800 Investment income ( 4% of $ 1,470,000) = 3% inflation count next 30 Years will require $ 3,545,980. 이것을 만족 시키기 위해 $ 1,764,287 이 있어야 하며 집과 자동차를 위한 $ 800,000을 합하면 $ 2,564,287이 있어야 은퇴 할 수있다.
이것은 나의 경우이고, 각자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어떤 직장인은 정부 Support + 회사 Retirement income + RRSP + 집 + 자동차 + Cash = Total 독립 자금으로 계산 될 수 있다. 그리고 경비도 각자 다르게 산출 될 수 있다.
두번째 고민은 어디에서 은퇴 생활을 하고 언제 할 것인가?
- 우리 아이들은 모두 북미 중앙에서 동부, Toronto, Detroit 부근에 살고 있어 London, Ontario로 정했다.
- 나이는 처음에는 58살에 은퇴하여 1년 반 가량 신나게 놀다가 60에 다시 공장 짖고 10년간 더 일하다 70에 은퇴 하였음 : 58에 은퇴 할 때는 젊었고 정력이 왕성 하여 잘 놀았으나 그냥 노는 것이 능사는 아니 였다. 70 까지 일을 할 수 있어 얼마나 다행 이었나 생각된다. 30년을 더 살아야 한다고 생각 하니 10 년 동안 까먹지 않고 시간도 적당히 보내 경제적 여유와 시간들이 적절 하다고 본다. 될 수 있으면 70 까지는 일 했으면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너무 힘이 빠져 제2의 인생이 너무 늦게 시작을 하지는 말아야 겠다.
세번째 고민은 은퇴 후의 삶에 대한 Vision이다. 다음이 나의 Vision 이다
- 시인이 되자 : 수필도 쓰고, 시도 쓰고, 독서하고, 낭만에 빠져 보자
- 예술가가 되자 : 붓글씨, 사군자, 사진 작가, 악기 연주( Clarinet, 대금, Guitar ), 노래
- 취미를 갖자 : Golf, 당구, Bowing, Dart, Tai-Chi
- 여행자가 되자 : 세계여행, 북미 여행, 사진 여행, Trailer 여행
- 공부를 하자 : 새로운 도전, Computer; internet, U Tube, I Phone, I pad, Camera
- 믿음 생활 : 교회 생활
- 더불어 사는 삶 : 교회, Golf 모임, 노인회, 한인회, 사진동호회, 동양화 모임
- 사회에 기여 : 봉사 활동, Church , Donation
넷 째는 건강 관리와 옳바른 자세의 늙은이 생활
아무도 간섭 받지 않는 생활이라고 내 멋대로 살 수는 없지 않을까 ? 우리는 자신을 관리하고 규칙적이고, 꾸준한 운동 그리고 조화된 식단으로의 관리와 부지런함 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호기심 가득한 삶으로 희망과 소망을 가지고 흥분된 삶으로 가슴을 뛰게 하자. 사랑으로 넘치는 삶으로 주위를 훈훈하게 만들어 따듯하고 온화한 삶으로 가득 채우자. 관대하고 부지런 한 노인으로, 열심을 내는 노인 누가 보아도 가벼운 발거름으로, 긍정적인 삶의 주인이 되자! 시간을 내어 도움이 필요한 사람과 장소를 찾아가 필요를 채워주는 반가웁고 고마운 노인이 되자! 빛과 소금이 되는 삶으로 채워서 살고 싶은 세상, 함께 하고 싶은 사회가 되도록 걸음을 주는 노인으로 살아가자! 그러나 가끔씩 행방불명이 되어 궁금 해 하는 시간을 만들어 집사람과 함께 훌쩍 떠나 새로운 세상을 그리고 미지의 세계를 걸어 보는 탐험가도 되어 보고, 자연과 함께하는 낭만속에서, 추억의 사진도 만들고, 갑자기 찾아가 반가운 얼굴을 만나며 함께 하는 시간을 갖어 보자.
이렇게 나는 은 퇴 생활을 설계하는 공작에 착수 했으며 연구 하였다.
나는 선배로써 후배들의 제2의 삶의 시작은 명상에서 부터 시작 했으면 한다. 우리는 어려서는 부모와 사회, 학교에서 많은 영향을 받고 자랐고, 그들의 기대에 부응 해 살아 왔고 , 젊어서는 가정을 이루고 직장생활이다, 사업이다 하며 바쁘게 밀려서 살아 왔다. 내 마음 내키는 대로, 하고 싶은 대로의 삶이 아니요 주위의 필요를 채워 주는 삶이 었었다. 제2의 삶은 좀더 여유를 가지고 숨고르기를 하며, 과연 나는 어떻게 제2의 삶을 설계 해야 할까 ? 멈추어서 자신에게 물어 보는 것이 우선이 아닐까? 하고 생각 한다. 우리는 뒤돌아 보면 고등 학교의 교복을 벗어 던지고 대학교라는 자유의 문을 들어 서면서 그 때에 얼마나 심각하게 내 제1의 인생을 설계 했던가? 나는 무엇을 원했고 이루었나? ….. 우리는 새로운 인생 대학에서 과거의 교복을 벗고 제 2 의 인생을 설계하려고 합니다. 같은 실 수로 제2의 인생도 끌려 가시 렵니까?
나는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 당신은 무엇을 원하 십니까?
모든 것을 내려 놓고, 울타리를 모두 허물고, 당신을 자유인으로 풀어 놓으세요 그리고 생각 하세요! 내가 진정 원하는 삶이란 무었일까?
황당 하지요, 우리는 이러한 상황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자유로와 본 적이 없습니다. 나도 한 동안 멍하니 있었고, 생각의 근육이 풀려 아무 것도 답을 낼 수가 없었다.
툭 튀어 나온 답이 “ 행복” 하고 싶다 였다.
나는 여러분에게 자신들의 행복이 과연 무었인지 알아 보는 숙제를 내주고 싶다.
1) 나의 행복은 과연 무었일까?
나의 수필집 행복이란?
우리는 모두 행복하기 위해 행복이라는 열매를 어떻게 하면 달콤하고 맛있게 만들까 하고 일생을 노력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보면 종교도 각자의 삶의 도로요 지침일 뿐, 결국 궁극적인 목적은 이 행복의 열매를 만들기 위한 것이요 우리의 삶의 수단이요 방법이며 노력인 것이 아닐까?
그러니 우리는 이 행복의 관을 올바로 세우고, 내가 원하는 행복이 무엇이고, 왜 나는 행복 해야 하고, 어떻게 행복해야 하며, 무엇에 행복해야 하는지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소크라데스가 말한 너 자신을 알라의 본뜻은 과연 나는 행복이라는 열매를 어떻게 만들어 가고 있으며, 어디에 가치관을 두고 자신을 Drive하고 있는지 돌아보며, 기독교나 불교에서 말하는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며 자신을 항상 밝히는 등불의 기름이 떨어지지 않게 채워가며 밝히고 점검하는 삶이 행복으로 가는 길인 것이 아닐까? 이 행복이란, 돈 보따리가 하늘에서 뚝 떨어져서 하루 사이에 일확천금을 바라는 허황된 꿈이 아니요, 일생을 살아가는 과정이요, 내가 만들어가는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할 것 같다.
이제부터 차근차근 나의 인생에 엉킨 실타래를 풀어 행복의 길을 향해 차분히 한걸음씩 나아가는 자신을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행복이란 우리에게 주는 열매요 목적이라기 보다는, 각 발걸음 마다 묻어난 행복의 눈송이가 모여 조금씩 쌓아 가는 것이요, 순간들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하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만이 진실로 존재하며,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는, 느낄 수 있는 현실이며, 존재하는 실체이니까.
행 복 론 (幸 福 論)
우리는 얼마나 심각하게, “나는 과연 진정으로 무엇을 원하는가?” 하고 생각하며 살아왔나. 그저 주위의 기대와, 그들의 가치관, 부모와 형제들, 친구들, 선생님, 그리고 직장의 상사와 동료들에 의해 기대되는 삶들을, 이에 상반되고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하며 살아왔던가! 또한 교회, 절, 성당 등 종교의 지침이나, Bible또는 경전에 의해 만들어진 바른길로 살고, 가치관도 만들며 노력하고 살아오지 않았나.
이제 모든 것을 내려놓자, 나에게 부여된 주위의 조건과 한계 조차도 모두 내려놓고 정말로 자유롭게, 생각해 보자. 만약 이제 Aladdin’s Lamp 속에서 Genie가 나타나 “주인님 Master 무엇을 원하십니까? 무슨 소원이 던지 들어 주겠습니다.” 하고 말할 때 과연 우리는 어떠한 답을 그에게 줄 것 인가?
건강을, 돈을, 권력을, 학식과 지혜를, 완전한 믿음을, 자유를, 가족을,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마음을, 진정한 친구를, 사람들의 마음을 읽기를, 청정한 마음을…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날 수 있는 능력을, 천리를 볼 수 있는 눈을, 모든 운동의 최고가 되기를, 모든 악기를 연주 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해 달라고, 마술의 재능을… 영생을 달라고 할까?
우리의 뇌리는 너무나 많은 욕구들로 스쳐 지나 갑니다. 이 모든 것을 다 갖게 된다면 정말로 행복하게 이 세상을 살아 갈까요? 이것이 과연 우리가 원하는 삶일까요? 우리의 인간은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갈망의 늪의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는 Helen Keller 여사의 이야기를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장님이요 귀머거리인 그녀가 우리가 생각하면 장애를 안고 세상을 저주하는 삶을 살기보다는, 대학교 졸업장을 쥐고, 멀쩡한 사람보다 뛰어난 정신력과 능력으로 여성운동, 아이들의 문제, 신앙의 간증을 통해, 보람 있는 삶의 발자취를 보였으며, 많은 장애인 들에 희망을 준 삶입니다.
Tuesday with Morris의 주인공인 Morris씨는 류게릭(Lugaric Disease) 병으로 죽어가는 순간까지 긍정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시는 자취를 보며, 불행은 그의 삶을 지배하지 못했음을 본다.
T.V. 드라마에서 세계의 많은 장애인들의 뛰어난 묘기와 씩씩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우리는 주어진 올바른 육체와 건강 만으로도 얼마나 감사 할 것이 많은 줄 알고, 그 이상의 욕심을 부리는 모습 앞에 숙연할 따름입니다.
인간은 욕심의 동물입니다, 더 많은 것, 더 좋은 것, 더 맛있는 것, 더 멋있는 것 들을 원하며, 그것을 얻기 위해 친구를 배반하고, 이웃을 범하고, 이웃 나라를 침범하고, 전쟁을 합니다. 우리는 생생한 많은 역사의 뒷면에는 이렇게 욕심을 부리며 살아온 자취들로 얼룩지어 왔음을 봅니다. 이 역사는 소수의 특정 층을 위한 잘못된 행복이 만들어 놓은 소산 들입니다.
이제 우리는 모두가 함께 공유할 진정한 행복을 찾아야 하지 않을 까요?
그럼 과연 행복이란 무엇일까요?
마루쿠제는 “행복을 추구하는 자체가 불행의 시작이다”
소크라 테스는 “행복이 있다고 망상을 품는 자는 불행의 문을 연다”
마가렛 오리펀트 “고통을 격지 않고 사들인 행복은 없다”
B 러셀 “원하는 것을 모두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다”
“노력과 체험의 황금률도 행복의 도움이 된다.”
칸트 “행복을 추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
는 사람이 되는 것이 더 중요하다.”
H 스펜서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다 행복하게 되기 전까지는 어떠한
사람도 완전히 행복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나름대로 행복을 바라본 말들입니다,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려운 것이 행복인 것 같고 행복하겠다는 것 자체가 사치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나는 한때 다음과 같이 행복을 정의를 했었습니다.
“우리의 삶과 행복은 자유와 융통성이며, 순간순간들의 축척과 노력이며 유기적인 존재이며 상대적인 것으로 일단 묶어놓고 소유하고 절대적인 가치가 부여된 순간부터 맛과 색깔을 잃어가는 것이다. 그리고 어떠한 여건에 관계없이 자유로운 상태에서 자신의 양심의 소리와 감정에 거리낌 없는 행동들로 만족한 상태다” 라고요. 나는 행복은 살아 있는 나무와 같은 유기체로 봅니다, 기본적인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자라나고 그 위에 가지와 잎이 생겨나고 사랑과 자비의 열매를 맺으며 주위에 인간의 향기를 사람 냄새를 풍기는 삶을 살아가는 과정과 끝없는 여행길에 행복이라는 단어를 붙여주고 싶습니다.
건강, 평온, 명랑과 적당한 부가 조화된 흙 속에서 행복의 뿌리가 자라 줄기를 만들어 내고 행복의 나무라는 유기체가 만들어 지는 것이라고 봅니다.
건강한 육체와 정신 속에 평온한 마음을 가진 사람의 주위에는 명랑한 삶의 사람들로 하나 가득하고, 밝은 웃음과 긍정적인 마음에,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삶 속에 행복의 줄기가 자라고, 적당한 부는 구차하게 구걸하지 않으며, 너무 많아 치산하느라 시간을 빼앗기지도, 그리고 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는 불안의 마음으로 정력을 낭비하지도 않으니, 적당한 만족이란, 욕심을 조절하는 중용의 미덕을 가질 수 있는 삶의 지혜이며 은총이 아닐까? 끝없는 욕심의 뿌리를 끊고, 빈 마음을 닮아가는 삶의 자세가 결국은 행복의 길이요, 불교에서는 해탈이라고 했고, 기독교 에서는 욕심을 버리고 나를 부정하는 삶으로 가는 믿음의 중심인 것. 이 속에서 행복의 나무가 튼튼하게 자라며 꽃의 향기 즉 사람 냄새를 내고 자비와 사랑의 열매를 맺는 이 모든 과정이 행복인 것 아닐까? 그러니 이 유기체는 생명을 갖고 있는 것 살아서 숨쉬고 계속해서 자란다고 봅니다, 그러니 멈추면 죽는 것이다, 그러니 만족하고 멈추는 것이 아니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되 사람답게 살아 가야 그 과정 속에 행복이라는 뿌듯한 마음으로, 보람으로 아무 Stress없는 삶, 주님이 말하는 천당과 불교의 극락의 삶을 살아 가는 것이 아닐까?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행복 논”이요 행복은 끊임없이 경작하고 가꾸는 과정자체이며, 땀을 흘리고 노력하며, 주위의 사람들에게 사람냄새를 풍기며 자비와 사랑으로 살아가는 삶 속에 존재하며, 자연과의 조화로 창조주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 속에 느끼는 감정들의 자취일 뿐이라고 봅니다. 안개같이 조용히 있다가 사라져 버리는 저축도 안되고 붙들어 맬 수도 없지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 이란?
앞에서 연구한 “나는 과연 무엇을 원하는가?”의 답은 ‘행복한 삶’이었고 이 행복이란 한마디로 정의 하기엔 너무나 오묘하고 넓고 깊은 의미들이 있었고 유기적인 존재로 많은 요소들이 얽히어 있으며, 살아 있고. 나무가 자라듯 성장하며, 그 과정 속에 존재하며, 변화 무쌍하고, 붙들 수도 잡아 맬 수도 없는 안개 같은 것이라고 했지요.
나무가 뿌리 없이는 자랄 수 없듯, 행복도 뿌리에 해당하는 기본요소와 필요조건이 있고, 나무는 물과 영양분을 뿌리를 통해 줄기와 가지에 전달하고 잎을 만들고 햇볕과 공기를 받아들여 탄소동화 작용을 통해 풍성하게 자라며, 성장하고 꽃을 피웁니다, 그리고는 열매를 남기지요. 이 모든 과정은 열매를 맺기 위함이요, 마지막에는 잎도 떨어지고 꽃도 지고 자연의 섭리대로 모두 버리고 떠납니다.
우리의 행복의 나무도 이러한 과정을 거쳐 사랑의 열매를 맺고 잎과 꽃은 떨어지며, 사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사람과의 사랑의 열매만 남기고, 그 밖의 이름도, 시간도, 행복까지도 모두 두고 떠난다. 허세를 부리고, 아름답게 입고, 맛있게 먹으며, 멋진 자동차도, 집도 모두 두고 떠난다. 우리가 그렇게 기쁘고 즐거웠던 시간들도 우리는 가지고 갈 수가 없다. 불교에서는 무상이라고 했고, 기독교에서는 헛되고 헛되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베푼 사랑 속에서는 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다.
떠날 때는 이렇게 허무한 인생이지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우리의 오늘과 지금은 현실이며 진실이고 살아있는 순간인 것이다. 이 순간이 행복의 연기를 내고 향기를 피며 살아가는 인생이라면 많은 사랑의 열매를 맺을 것이요, 그들의 삶 속에, 기억 속에 우리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우리의 삶은 이 행복의 나무를 키우고 가꾸는 과정이며, 그 속에서 행복이라는 By Product를 얻으나 잎과 꽃이 잠시듯 기쁨과 감격은 메아리가 사라지듯 살아 지며, 그 동안의 많은 노력과 시간 속에 가꾸어 놓은 사랑의 열매만 남아 있고, 우리 인간은 이 사랑의 열매를 먹으며 윤회의 삶을 계속한다.
이것이 자연의 섭리이며 하나님이 우리를 이 땅에 보낸 목적인 것이다.
행복을 만드는 나무의 기본 요소들
1.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습관을 갖는다.
2. 평온한 마음을 유지 한다
3. 명랑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갖는다
4. 항상 배우고자 하는 학구열을 갖는다
5. 모든 삶을 살아가는 적절한 부를 갖는다
6. 더불어 사는 삶을 유지하고 노력한다
7. 자신의 개성을 만들고 가꾼다
8. 취미 생활과 여행을 하며 자연을 알아간다
9. 신앙 관을 올바르게 수립하고 따른다.
행복의 꽃과 열매
1. 사랑과 자비의 행위: 인 류 애
2. 해 탈: 나를 버리고, 마음을 비운 건덕지 없는 삶
3. 자연과의 일체로 Stress free의 삶: 자연인
이제부터 차분히 행복을 만드는 기본요소들을 우리의 일상 생활에 적용해 보는 방법을 찾아, 이 행복의 나무를 키우는 삶을 살아 가며 이 순간들 속에 행복의 향기가 퍼져 나와 우리 주위에 행복이 가득한 삶을 살아 봅시다.
1. 건강한 몸과 마음을 유지하는 습관을 갖는다.
건강한 몸은 건강한 마음에서 오며 조절된 식사와 규칙적인 생활의 습관과 절제된 몸가짐 속에서 온다고 본다.
l 건강한 마음: 명상과 수양을 통해 사성제(苦,集,滅,道)를 깨닫고, 인생의 8고(生,老,病,死,怨憎會,愛別離,求得不,五取藴)를 극복하며 그 마지막인 오취온(몸,감각,지각,의지,판단에 집착한 고통으로 3고가 있고) 이 3고(고고:7고, 회고:허무한 마음, 행고:존재 자체의 괴로움)를 넘어 부처님이 깨달은 삼법인: 고, 무상, 무아의 진리를 철저히 깨닫는 수행의 생활로써 건전한 마음을 유지 할 때 건강한 마음을 갖는다.
l 조절된 식사: 규칙적인 식사와 Balance Diet를 한다. 기름지고, 몸에 독이 되는 음식과 술 등을 삼가고 소식을 한다.
l 규칙적인 생활: 하루의 일과 계획을 세우고 그 속에서 습관을 기르고 충분한 수면과 적당한 운동을 해서 육체가 항상 건강을 유지해서 매사에 정력을 낼 수 있는 마음의 기초를 이루어야 한다. 배움과 개성을 만들어 가는 생활에 게으르지 않고, 명상과 수양의 시간과 자신의 하루를 반성하며 주님의 은총에 감사하는 마감의 시간을 갖는다.
l 절제된 몸가짐: 욕심과 탐욕을 버리고, 그렇다고 꿈 즉 Vision을 버리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3독(貪,瞋,痴)에서 벗어 나라는 이야기 이다. 겸손하고 듣고 이해하며, 자비와 사랑을 가지는 따듯한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그리고 매사에 최선을 다하되, 주님이 주신 양심의 소리에 한치의 부끄러움이 없는 행동으로 집착을 버리고, 순수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구하며 항상 살어름을 밟는 자세로 실수 없는 행동을 추구하며 사는 삶.
이러한 삶의 습관들로 길들여 지며 살아가고, 항상 깨어 있으면, 정신적인 건강과 육체적인 건강을 항상 유지 할 수 있으리라 본다.
2.평온한 마음으로 산다.
평온한 마음이란 요동치지 않고 조용하고 부드러운 마음이다. 봄의 햇살과 같이 따듯함이 있어 사랑의 씨앗이 움틀 수 있는 마음, 겨울의 살을 애이는 듯한 차가운 바람이 아니고 잔잔한 호수 위의 바람같이 깊고 고요한 마음, 무엇이 던지 받아 주고 들어 주는 넉넉한 마음이다.아무리 많은 배들이 지나가고, 새들과 동물들이 흩으려 놓아도 곧 모두 사라져 버리고 다시 잔잔해지는 넓고 깊은 호수 같은 마음이다.
“미움도 없고, 욕심(탐욕)이 없어,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꺼리고 멀리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요, 사랑과 믿음이 있어 모두가 기대고, 같이 하고 싶은 마음의 소유자 이다”
이런 마음의 소유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떠한 노력과 수양이 필요한가?
탐욕을 버린다: 텅빈마음을 갖는다, 이 세상에 나에게 꼭 필요한것 이상을 바라지 말자, 모든것을 두개이상 갖지 말자.
잘 듣는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늘 생각하는 습관을 기른다.
자비: 님에게 무언가를 베풀때는 돌아오는 대가나 기대는 버리고 하라. 그리고 나라면 어떻게 해 주기를 바라는가? 그 이상으로 하라.
최선과 중용: 자신의 분수와 역활에 알맞게 행동과 최선을 다 하며, 중용을 취하고, 순수하고 깊은 가슴의 소리에 귀를기울이고 따른다.
명상: 항상 조용한 시간을 내어 성찰하고 반성하는 습관을 갖는다.
3.Attitude: 명랑하고 긍정적인 자세
명랑하다는 말은 밝은 사람, 희망찬 사람, 긍정적인 사람이 보이는 모습이다. 그래서 주위를 밝히며, 같이 하고 싶은 마음, 믿음직 스럽고 따르고 싶은 마음이 생기는 사람이다.
밝은사람: 거짖이 없고 바르다, 투명하다, 숨길것이 없다, 빛을 발하는 사람, 즉 Vision과 꿈이 있다, 목표가 있다, 올바른 길을 밝힌다.
희망찬 사람: Vision이 있고 목표가 있어 활력과 정력이 넘친다, 그래서 주위의 사람을 끄는 지남철 같은 매력이 있다.
긍정적인 사람: 주위의 여건과 조건애 관계없이 자신의 가치관이 뚜렷해 흔들림이 없이 행동하는 사람. 믿음직 스럽고 중심이 확고한 지도자로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두렵지 않다.
이러한 사람은 미소로 사람을 대하고 여유가 있다, 역경과 고난을 기회로 만들어 긍정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가치관을 가지고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 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옳바른 가치관을 갖도록 자신을 훈련하고, 명상하고, 지혜를 구하는 매일의 생활에 게으르지 말며, 마음을 정화시키고, 욕심을 버리는 습관을 잃지 말자.
4. 탐구력: 항상 배우고자 하는 학구열
배움에 대한 갈망, 목이마른 사람은 물을 먹는것이 자연스러웁고 쉬우나, 건강에 좋다고 억지로 물을 마시려 해도 갈증이 없으니 매우 어렵다. 갈증을 만들기 위해 운동도 하고, 땀을내면 자연스럽게 물을 마실 수 있다. 그러면 배움의 갈증은 무엇인가? 공자는 困而學之 즉 알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곤궁에 처해 배울 수 밖에 없다고 했는데, 그 위가 學而知者라 했고, 즉 공부를 해서 배워 아니 곤경에 대해 대처 한다다. 또 知之者는 不如好之者 그냥 아는자는 그것을 좋와 하는 것만 못하고, 好之者는 不如樂之者, 그냥 좋와만 하는자는 그것을 행동에 옮겨 즐기는 것만 못하다라고 했다.
이렇게 배움을 실천에 옮겨 즐기는 생활 습관이야 말로, 배우는 연습치고는 최고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자연히 좀더 많은것을 알고 싶은 갈증이 생겨나고 학문을 좋와하게 되는것이 아닐까?
우리는 끝없이 배우며 살아가는 인생이고, 공자는 益者三友 중에, 友多聞을 꼽았다, 많은것을 알아야 훌륭한 친구도 될 수있고 주위의 필요에 도움을 줄 수 있다.
그러나 요즈음 같은 세상에 지식과 information이 너무나 많이 널려 있다 잘못먹으면 체하듯이 허겁지겁 아무것이나 털어넣는 식충이가 되어서는 아니 되겠다.
공자께서 學而不思는 則罔이요 思而不學은 則殆라고 했다, 배우되 명상하기를 잃지말라, 즉 소화를 시켜가며 차근차근 먹고 골고루 식의 건강을 유지하라고 하셨고. 머리속으로 명상만하고 태만해 지식이 없어 엉뚱한 상상력 속에 빠져 도사같은 편옆한 외골수의 사고 방식으로 편식을해 정신의 병을 앓지 말고, 선인들의 생각과 그들의 지식을 받아 들여 골고루 알고 우주와 전체를 볼 수 있는 넉넉한 지식의 소유자. 즉 생각의 편견과 외골수가 아니요 전체를 아는 지식인이 되어야 한다.
아는것은 알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 할 수 있는 솔직함과 여유있는 Balance가 맞고 편견을 버리는 삶 속에서 행복의 맛을 아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본다.
결국은 아는 지식만이 중요한것이 아니요, 삶의 참 목적을 깨닫는 지혜와 더불어 사는 삶의 중요성을 아는 현명함 속에서 실천하고 즐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고 본다.
5. 삶을 살아가는 적절한 부를 유지한다.
아주 오랜 조상(원시인)들은 부라는 개념이 있었을까? 짐승을 잡아 자신을 따듯하게 해주는 옷과 고기, 따서 쌓아 놓은 과일들이 자산으로 있었을까? 있었다면 단순한 그리고 단기적인 축척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살아가는 삶은 조금 복잡해져 있는것 같다.
우리의 삶에는 이 부의 가치와 양을 적당히 갖고,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는 이 자산을 모으기 위해 일을 한다. 기술을 습득하고, 지식을 쌓고, 어떤 사람들은 태어나면서 부터 부가 주어진다, 대부분이 그렇지가 못하지만. 그러면 과연 우리에게 얼마만큼의 부가 필요 할까?
- 너무 없어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피해를 주는 초라함이 없어야 하겠다
- 너무 많아 그것을 치산하느라 자신의 시간과 정력을 소비하므로 사람이 사는 맛과 세상을 느끼고, 자연을 즐기는 시간을 빼앗기지는 말아야 겠다.
한마디로 돈은 벌어야 하되, 필요 이상으로 쌓아 놓느라 정력을 소비하지 말자, 부에 노예가 되지 말자는 이야기 이다. 돈은 우리가 살아가는 필요 조건인것은 사실이다.
우리의 삶은 대부분 법정 스님처럼 아이들을 모두 팽개치고 산에 들어가 명상만 하고 살만큼 단순하지가 않다, 더 많은 업을 만들어 놓았다. 우선 우리는 부부가 있고 아들 딸들, 그리고 손자들이 있다 그리고 부모 형제 들이 있으며 친구들이 있다, 이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는가? 우리는 기본적으로 의식주의 기본을 책임져야 하고, Transportation, 기본의 의사소통망 & Entertainment는 오늘날 살아가는 또하나의 기본이 되어 있고, 배움의 삶을 유지 할 수 있는 책과 Music, Art등과 가끔씩 자연과 여가를 위한 여행 경비등이 기본 삶을 살아가는 부라고 본다.
그리고 우리는 언젠가는 병들고 죽는다. 죽는날 까지 누구에게 신세 지지 않고 자신의 삶을 책임질 수 있어야 하겠다. 이 부는 각자 다양하게 필요로 하겠으나. 기본적으로 사치한 삶은 아니되 구차하지 않는양으로, 자신의 삶에 걸맞는 계획속에 적당히 모아놓고 지혜롭게 살았으면 한다.
6. 더불어 사는 삶을 유지한다.
더불어 사는 삶이란 인과 관계이다. 사랑의 Exercise 이다. 원활한 인과관계 그들에게 베푸는 사랑, 만나고 싶은 사람들과 계속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그리고 어려운 일이기는 하나 怨憎會라 한다, 싫어하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人生事 八苦라 했고 그중에 다섯번째가 이 원증회인것을 어쩌나.
우선 더불어 사는 삶에 가장 중요한것이 무었인지 알아야 한다. 무차별적이고 전 인류를 사랑해야 하는것이 사실이나,
- 우선 자신이 속해 있는 가족을 떠나 타인들만 사랑 한다면 무책임한 행동이요 뿌리가 없는 화병의 꽃과 같아 오래가지 못한다.
- Wife/Hus와의 스스럼없는, 앙금없는, 순수하게 믿고 감싸주는 사랑이 없다면 이 세상에 홀로 서기가 쉽지 않다
- 자식과 부모 형제의 사랑이 없다면, 가족의 사랑과 교제가 없다면, 장작불이 홀로 타지 못하듯 이 세상을 살아가는 energy와 정력의 불길을 낼 수가 없으며, 희노애락을 함께하면 풍기는 사랑의 힘을 발휘 할 수가 없다.
- 이웃 사촌이라 했던가, 친한 이웃이 오히려 먼 사촌보다 더 가깝다. 그러나 요즈음 이웃을 얻기가 그리 쉽지가 않다. 가까운 친척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하며,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있는 사람, 동창과 선후배 들의 만남, 각종 모임에 참가 할 수 있으면 우리는 외롭지 않고 사랑과 정을 나누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 사회 활동과 인류애를 발휘 할 수 있는 모임과 장소에서 봉사야 말로 사랑을 나누어 주고 봉사 활동을 할 수 있는 길이다. 찾아 하고 그 속에서 보람과 살아 있음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따듯한 사람으로, 필요한 사람으로 항상 보고 싶고 반가운 사람으로 기억 되도록 노력 해야 한다.
전화, e-mail, 편지 등으로 안부를 전하고, 연락을 가질 것, 만남 후에 A/S를 잘할 것, 특별한날을 기억하고 상대방을 놀라게 해 주어라. 만남의 기회를 만들라. 상대방을 배려하며 희로애락에 인색하지 말며, 최선을 다 하자.
7.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고 가꾼다
류시화가 법정스님이 좋와 쓴책 “산에는 꽃이 피네” 중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세상의 유행을 따르는 사람들은 빨리 시든다.” 세상의 유행을 쫒다보면 끝이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자기 중심을 지니고 사는 사람들은 항상 새롭다. 샘물이 솟아나듯 끝없는 창조이나, 진리의 중심은 흔들리거나 사라지지 않는다.
꽃들은 자신과 남을 비교하지 않는다, 매화는 매화의 특성이 있고, 진달래는 그만의 멋이 있다, 이렇듯 저마다 최선을 다해 피어날뿐 어느꽃을 시샘하지 않는다. 비교는 시샘과 열등감을 낳는다. 비교하지 않고 자신답게 자신만의 삶에 충실할때 우리는 순수하게 존재 할 수 있는것이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각자 자기 나름대로의 삶의 질서가 있을 필요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중심은 무엇이고, 자신답게는 무엇이며, 또한 사람답게란 무엇인가? 그리고 자신의 개성을 만들고 가꾼다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모두 나에 대한 이야기이며, 내가 찾아야 하는 숙제이다. 우리는 명상과 성찰을 통해 이 해답을 찾아야 한다. 명상이란 가만히 앉아 있는것이 아니다. 성찰이란 자기의 삶을 늘 스스로 지켜보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나가는 명상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이다. 전자는 지혜이고 후자는 자비이다. 이렇게 해서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지녀온 불성과 영성의 씨앗이 맑고 향기롭게 꽃을 피우는 것이다.
중심은 우리가 지니고 있는 가치관이다. 자신의 가치관을 놓고 연구 하고 생각하며 up grade 시키는 시간을 갖어야 한다
자신답게는 하나님 께서 주신 나의 talent를 알고 자기의 꽃을 피우는데 최선을 다해 아름다운 꽃을 피워 세상의 아름다움에 일조를하며 조화를 이루고 하나가 되는것을 말하며.
사람답게란? 이 문제를 갖고 공자, 맹자, 노자, 장자, 법가, 순자등의 연구와, 예수님, 부처님들의 설교나 설법을 통한 선인들의 지혜를 빌리자면, 동물과 다른 사람은 정신적인 자유를 지녔다는것이다. 인도는 고대부터 사람의 삶의 목적은 세가지 인데, 육체적인 쾌락, 물질적인 욕구, 그리고 정신적인 자유라고 했으며, 이 정신적인 자유가 사람답게 만드는 답이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앙인 것이다.
그러면 자신의 개성을 만들고 가꾼다란? 내가 없으면 버릴것도 없고, 개성이 없으면 남과 구별 할 수도 없고, 즉 자연과 조화를 이룰 수가 없다. 공즉시색이요, 색즉시공이다. 자신답게 중심을 가지고 사는것이 개성이다. 항상 새롭게 만들고 가꾸고 노력해야 한다. 목소리만 들어도, 뒷 모습만 보아도, 향기만 맡아도 누구라고 알아볼 수 있게 자신을 만들어 가야 한다. 단 모든 사람들이 좋와하는 향기, 사람다운 향기가 가득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8. 취미 생활과 여행을 하며 자연을 알아 간다.
인생을 살아 가면서 삶을 즐겁게 하는 활력소가 있어야 한다. 만약 우리에게 인간과 동물의 다른점이 있다면 하고 묻는다면, 아마 “사람은 생각하는 갈대”다 아니면 “신앙을 가진 동물”이라고 답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사람은 취미 생활을 하고, 미지의 세계를 여행하는 습관 속에 다른면이 있다고 본다.
사람들은 서로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들 끼리 친하고 모인다. 많은 취미를 가진사람은 많은 부류의 사람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취미를 갖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걸까? 우리는 종종 이런말을 듣는다. 저사람은 참 고상한 취미를 갖고 있어, 혹은 저사람 취미는 저질이야! 비싼 취향인데.. 운동을 잘해, 음악에 소질이 있어, 그림 그리는게 취미야, 산사나이, 무척 쏘다니지, 먹는 취미, 남을 약올리는 취미, 비평의 취미, 글 재주가 있지!..등등.
취미는 무엇인가? 자신이 좋와 하는 것을 취하는것이다.
우선 내가 하고 싶고 좋와하는 것이 있어야 하겠다, 모든 사람들은 서로 다른 재능을 지니고 있고, 이 재능이 좋와하는 것으로 갈증을 만들어 내어 자연스럽게 취미를 만들어 가야 겠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남들이 다하니까, 나도 해야 하겠다고 하는 사치스러운 마음 또한 있다, 그러나 이러한 취미는 오래 가지 못하거나 졸작을 만들고 자신을 어렵게 만든다.
어떤 취미 생활은 우리를 달련시키고, 피나는 노력을 통해 습득 할 수 있는, 인간의 능력이면 누구나 할 수 있으나 쉽게 습득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는 자신을 잘 돌아 보고 남이 한다고 다 할것이 아니요, 자신이 가진 재능에 맞는 취미 생활을 찾고, 친구를 찾아 즐겁게 시간을 보내, 인생에 즐거움을 더하고, 활력소를 만드는 생활을 하며, 넓은 세상을 여행하며 견문을 넓히고,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대자연에 위대함을 알고, 가까이 하고, 감사하며, 하나가 되는 습관을 길러야 하겠다.
우리 또한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인내심을 기르며, 성취하는 어려운 취미 생활도 꼭 갖어야 하겠다. 이러한 취미 생활 속에서 자신을 훈련하고, 자신의 능력을 일단계 끌어 올리는 인내심과 이루었다는 성취의 긍지를 심을 수 있는 취미 생활을 우리의 일일 생활 계획표에 넣고 실행하는 습관을 갖자.
이 세상을 바쁘게 그러나 아무 목표도 없이 살아 가는것이 아니요, 조용히 명상의 시간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며, 한단계 Up Grade시키는 삶. 우리는 잘못된 배움 속에서 이 세상 모든것이 무인데, 무엇을 그리 애타게 바라며, 무아의 생활을 해야하며, 헛되고 헛되다고 외치며 vision도 꿈도 없이 살아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가르침이요. 자신을 좀더 큰 그릇으로 만들고 완성된 자신 속에서 비로써 버릴것이 있을때, 행복의 열매가 꽉찬 과일을 맺는 생활을 해야 한다. 빈 깍정이 같은 삶은 버릴것도 없다, 썩어진 열매는 아무도 원치 않는다. 우리는 삶을 이렇게 먹음직 스럽고 알이 꽉찬 과일의 열매를 만들고, 그 속에서 완성을 이루고 나서야 드디어 자신을 극복하고 내 놓을 수 있을때 무아니, 무상이니, 무주니 말할 수 있는것이 아닌가.
아무것도 없는 거지가, 텅빈 머리의 백치가, 인생을 헛살아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이 무엇을 내려놓고 버린단 말인가…
선택한 텅빈 삶, 선택한 가난과 나는 모른다고 말 할 수있는 풍성한 지식의 소유자이며, 사람들과의 삶에서 자비가 넘치는 넓은 가슴과 따듯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 명랑한 미소를 갖고, 긍정적이며 모든것에 충실한 사람만이 텅빈 충만을 느낄 수있고, 그 삶을 선택 할 수 있다고 본다.
취미 생활이란 우리의 인생에 어떠한 가치를 부여 하기는 힘들지만 기계에 기름이 없으면 아무리 좋은 기계도 쓸모 없이 되듯이 우리 삶에 기름이요, 활력소를 만드는 매우 중요한 요소로 본다.
9. 신앙관을 옳바르게 수립하며 따른다.
신앙관이란 무엇인가? 믿음인데, 우리는 무엇을 믿고, 누구를 믿고, 왜 믿는가? 신이란 무엇인가? 조물주란? 하느님이란? 영생이란? 해탈이란? 천당과 지옥은?
아마 위에 열거한 모든것 들의 답들을 종합해 보면 신앙관의 답이 나오며, 어떻게 믿고 따르느냐에 종교가 있는것 같다.
주위를 돌아보면 크게 몇가지 종교가 존재 한다: 기독교 ( 이스라엘교, 신교, 구교, 마호멧교, 영국 정교, 러시아 정교, 그리스 정교: 하나님(창조주)를 믿음), 불교 ( 선불교, 소승, 대승 불교, 일본식 정토왕생 : 해탈과 윤회를 믿음), 잡신교 ( 세상의 특별한 대상에게 머리 숙이고 복을 비는 종교 : 자연의 힘을 믿는 종교)와 이세상에는 아무것도 믿을 것이 없다는 무신교로 크게 나누어 볼 수 있다.
우리 인간은 자신을 믿던, 미신을 믿던, 종교를 가지던 무엇인가를 믿고 산다. 그래서 종교가 생겨 났고, 발전 되었고, 역사적인 필요에 의해 발전되고 정화 되어 왔다. 그러나 종교라는 껍질이 있는한 자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 속에서 곰팡이가 생기고, 부조리와 욕심의 싸움이 끝이 없다. 물론 종교는 우리 인생에 믿음과 희망을 주고 옳고, 바른 생활을 하도록 하며 세상의 빛이 되고 사랑을 나누고 자비를 베푸는 열정을 지니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종교의 목적이고 Goal인데 종교의 제도와, 지도자와 교회라는 조직이 자신의 존재를 Justify 하기 위한 파벌과 신의 이름들과 민족과 종교의 껍데기가 존재 하는한 이 순수한 종교의 목적이 (예수님과 부처님이 바라시는) 왜곡 되어져 왔고, 그 속에서 전쟁과 테러의 부조리가 생겨났다. 우리는 잘못된 신앙의 지도자의 그리고 맹신을 하는 주위의 신앙인들의 가르침에 빠져 그릇된 신앙을 가진다면, 이 파괴하고 헐어버리는 동조자가 되기 쉽고, 종교의 참 신앙인의 생활이 아니요, 교회나 집단이 바라는 그릇된 종교인으로 탈락해 버리고 만다. 그러면 과연 옳바른 신앙관은 무엇일까? 우리는 얼마나 진지하게 이러한 믿음의 진단을 했었나? 우리는 얼마나 맹신의 울타리와 올가미에 묶여 신앙생활을 해 왔던가? 우리는 정말로 모든 것을 다 내려 놓고 순수하게 원점에서 자신의 신앙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과연 올바른 신앙관이란 무엇일까? 나는 왜 이곳에 있으며,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어디서 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나? 이 모든 물음에 한치의 의심도 없는 답을 알고, 그 물음과 대답속에 옳바른 삶의 방법을 찾고, 그리고 우리의 몫을 다 할 때 우리는 올바른 신앙을 갖은 신앙인으로 사는것이 아닐까?
모든것을 내려 놓는다는 것은 지금 까지 배운 모든것을 내려 놓는다는 이야기다. 친구가 이야기한, 목사가 가르쳐준, 성경에 쓰여 있으니까, 어느 사람의 간증에서의 체험을 듣고 느낀 혹은 안 모든 지식을 백지화 하고 내가 정말로 찾아낸 답이라야 한다. 성경은 약 1600년 전에 만들어 졌다. 그러면 4000년전 사람은 어떻게 알았을까? 무슨 신앙을 가졌을까? 불교의 경전의 역사도 2000년이 못된다. 목사와 친구는, 장로는, 부모님은 어떻게 신앙관을 가졋나 누구에게 들어서 배웠나 무엇을 가지고, 창조주 하나님은 그 이전 부터 존재 했으며, 우리와 여러 방법으로 대화하고 접촉 했으며, 우리 안에 예전 부터 심어 놓은 뿌리와 연결이 되있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잘못된 지식과 선입관들로 쌓여, 속을 들여다 볼 시간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당연하게 믿은 나의 믿음의 뿌리가 허상이었다면, 아무근거 없는 바탕이었다면, 얼마나 어리석은 삶을 우리는 살아 왔고, 살려고 하는가? 이것이 맹신이며, 장님이 장님을 이끄는 위험한 길을 무얼믿고 산단 말인가? 다들 그러니까, 남들이, 많은 사람들이 가니까, 우루루 그져 안심이 된다고요, 같이 다들 죽겠냐 입니까? 그것이 답입니까?
이제 정말로 모든것을 내려 놓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고요한 시간을 가지며 우리의 뿌리, 하나님이 심어놓은 마음의 소리를 들으며 생각해 보자.
-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지금이야 말로 현실이며, 내가 현존 하고있는 것, 느끼고 있는것은 사실이고진리이며 그외의 모든 것은 상상이며 생각일 뿐이다. 나의 존재는 하나님의 은총인 것이다.
- 어디서 부터 왔으며 어디로 가고 있나?
역사를, 고고학을 연구하고, 우주와 천체를 연구하며 갈망해온 우리 조상과 선배들이 낸 결론은 다음과 같다
무에서 유가 창조 되었다
무도아니고 유도아닌 조물주에 의해 창조 되었다
자연의 신비와 법칙 속에서 우주와 인간이 존재하고 있으나 어떻게 진화 될지는 모른다. 그러나 내가 아는 한가지 사실은 나는 정자와 난자의 만남 속에서 부모에게서 태어 났고, 그리고 나는 결혼해서 우리 아이를 낳았고, 그들 또한 손자들을 만들었다는 사실이다.이렇게 해서 내가 존재하고 나의 분신인 아이들이 계속 퍼져 나가고 연결 되는 것이다 (종교적인 언어로는 이것이 윤회요 영생의 고리이며 우리가 느끼는 사실이다.)
- 무엇을 위해 존재하고? 우리의 역활은 그리고 왜 ?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자연의 한 부분으로써의 역활을 해야한다. 자연의 법칙을 잘알고, 그에 순응하며 살아 가야한다. 자연을 파괴하거나 법칙에 역행하는 행동을 한다면 자연이 자신의 법칙을 지키기 위해 노 하거나, 우리몸에 병균이 침투하면 우리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감싸고 죽이듯이, 자연이 자신의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인간을 멸망 시키고 말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인간은 정자와 난자의 만남 속에서 생겨낳으며, 자식을 낳고 죽는다. 자식은 또 자식을 낳고… 이렇게 수 많은 세월을, 세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럿다. 기적적으로 수많은 역경과 파란 속에서 오늘 까지 살아남은 은총의 삶인 것이다. 그리고 미래를 향해 힘차게 전진하고 있다. 이 자연은 이렇게 생산과 죽음의 반복 속에서 진화하고 발전해 나간다. 이자연과 우주의 일부로써 시간과 함께 흘러가고 있는것이다.어디까지 가는지는 알 수 없으나, 자연의 법칙이 우주 조화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있는한 계속해 번창할 것이다.
우리 인간은 우주 창조에 한몫을 한 것도 아니요, 동식물 보다 우월한 특권을 갖지도 않았고, 자연의 법칙을 떠나 천당이니, 지옥이니 하는 곳으로 떠나는 Vacation package가 있는 것도 아니요, 유도아니고 무도아닌 해탈과 극락의 세계가 따로 존재하지도 않는다. 이 모든것이 얼마나 허무 맹랑한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허상이며, 허세인가. 이 모두는 인간이 현세를 도피하고 싶은 욕심에서 만든 허상이며, 도피이며, 자기 최면인 것이다.
자연의 신비인 오늘만이 현실이요 은총이다. 자기최면에 걸려있는 허상과 허구 속에서 공상과 허상을 향해 노력할 것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현재를, 이 자연을 좀더 바라보며, 우리의 만남을 은혜로 생각하며 좀더 가치있고, 평화로운, 의미있는 삶으로 만드냐에 정력을 쏟아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자연의 일부로써의 역활과 의무가 있고 목적이 있어 존재 하고 있다고 본다.자연과 사람들과의 만남과 인연 속에서 우리들의 역사를 만들고, 미래에 올 우리의 자손들과 자연을 위해 현재의 맡은바 의무를 충실하게 수행 하며 살아가야 한다고 본다. 모든 아니 어느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생활, 아무 건덕지가 없는 생활 속에서 순수해 질 수 있는 자신을 만들기 위해 살아가는 지혜를, 명상의 시간 속에서 고요함과 평화로움을 가진 생활 속에서 진리를, 나의 존재 목적을 찾으며 살아가는 새로운 습관을 만들어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참 진리 속에서는 종교라는 껍질이 없어, 서로 네가 옳고 그름이 없고, 믿음의 깊이가 없어 네가 잘 믿고, 들믿고의 판단이 없고, 죄도 없다. 그러므로 싸움도 없고 기복 신앙적인 기도도 없다. 단지 현재가 있고, 느낌이 있고, 이웃이 있고, 모든 자연의 존재와 하나님이 거져주신 햇볕과 공기와 물등의 은총에 감사하는 감사의 기도만이 있을 뿐이다.
우리가 존재하는 자연은 만세전에 조물주가 자연의 법칙에 따라 정교하게 만들었고, 그 원칙 속에 존재하며, 우리는 한 세대를 살지만 조상에게서 받은 바톤을 후세에게 연결해 주는 고리 속에 있으며, 물이 흘러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듯, 이 역사 속에서 흐르며 산다. 거슬려 면 내려오게 되고, 고이면 썩어 버리며, 자연의 법칙대로 썩으면 걸음이 되고, 증발하면 비가 되어 내린다. 자연은 끝없는 윤회요 굴레다, 돌고 돈다. 자체를 치유하고, 법칙을 유지하는 큰 힘이다.
이 모든 것이 우리가 보고 느끼는 “참” 이며 사실인 것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이 자연은, 조물주는 특정 인물과 자신의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 이 자연의 법칙을 깨고 기적을 나타내지 않는다. 그것은 자기 파멸이요, 자체의 붕괴를 의미 하는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기적이나 많은 근거없는 기적들은 우연히 나의 바램과 자연의 현상이 일치했던 우연한 순간이 존재 할 수는 있으나, 그것이 조물주가 나를 위해, 내 기도 빨이 먹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물론 내 머리로 상식으로 알 수 없는 제 3의 힘과 보이지 않는 또다른 자연의 현상을 우리는 모두 알 수는 없는 것은 사실이다. X-Ray, Ultra wave, 자석의 힘과 같이 우리가 볼 수 없고 오관으로 판단 할 수 없는 힘들과 우주의 신비를 우리가 감히 다 안다고 할 수 없고, 조물주의 능력을 알 수 없으며, 우리 인간을 어디로 몰고 가는지도 알 수없다. 다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기적과 종교가 모두 인간의 욕심과 인간 중심적인 발상이었으며, 기복적으로 치우치고, 불완전하며 나약하고, 힘이없고 죽어 있으며, 인간끼리 싸움이나 하는 도구로 전락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인간은 믿음이 필요한데, 뿌리 없는 나무에, 썩어 죽은 가지에 나의 믿음을 걸을 것이 아니요, 살아 있는 나무와 실체에 자신을 맡기고 살아 가야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다.
결 론
행복을 만드는 나무들의 기본 요소들을 하나씩 분석하며 점검을 해 보았다. 결국 우리는 가치관을 어떻게 가지고 살며, 그 위에 중요성을 넣은 순서대로 정 할 때. 우리 삶의 순서가 정해지며 이 속에서 참 나를 볼 수 있고 점검 한 시간과 저울과 잦대를 만들어 본 것 같다.
이 제부터 양파를 벗겨가듯 자신을 알아보는 시간을 갖고, 다듬고 일구어 가는 명상의 시간을 갖고 나의 행복의 삶을 시작하자.
하 루
우리의 인생은 하루에 태어나 하루하루를 살다가 한살이 되고 한살한살이 모여 열살이 된다. 열살들이 모여 육순이며, 백살이 된다. 하루도 따지고 보면 지금의 이 순간들이 모여 이루어 지는 것.
우리는 이 순간들을 살아간다. 지나간 순간들은 다시 돌아 오지 않는다. 시간의 개념과 세월의 개념들이 우리의 순간의 삶을, 가치를 싸잡아 무듸게 만들고 그 가치를 상실하게 하는것 아닐까?
지난 세월 70평생이 훌쩍 지난 지금 돌아 보면 너무나 많은 순간들을 흘러 보냈다. 가끔씩 찍어놓은 snap사진 속에서 그 순간들을 기억하고 보지만 나는 한번도 그 순간에 충실해 본적이 없었던것 같다, 다시 말해 그 순간을 얼마나 느끼며, 감사하며, 인식하며 살아 왔느냐고 묻는다면.. 스치고 지나온 기억 밖에 없다. 느끼고, 인식하고 감사하고 바라보기 위해, 그 순간에 멈추어본 기억이 나지를 않는다. 그냥 열심히 여기까지 달려온 인생이었다. 마치 자동차 경주에 목표를 향해 달려 가듯 말이다.
우리는 이 순간을 느끼며 사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 Brake를 밟으면 낙오자 라도 되는양 마구 인생의 패달을 밟으며, 발을 띄워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제라도 조금씩 순간에 관심을 두고, 자신을 멈추는 습관을 같자. 왜냐하면 이 순간 만이 진정한 현실이며, 사실이며, 느낄 수 있는 진실(Truth)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모두 허상이요 아무 가치도 부여 할 수 없지 않은가? 지나간것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미래란 아직 만질 수 없는 허상인 것이다.
왜 우리는 이토록 진실을 망각하며 살아 왔는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현대 구룹의 창시자 고 정 주영회장님 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나는 젊었을 적부터 새벽 일찍 일어난다. 왜냐하면 그날 할 일이 즐거워서 기대와 흥분으로 마음이 설레기 때문이다. 소학교 때 소풍가는 날 아침, 가슴이 설레는 것과 꼭 같다. 또 밤에는 항상 숙면 할 준비를 갖추고 잠자리에 든다. 날이 밝을 때 즐겁고 힘차게 해치워야 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이렇게 행복감을 느끼며 살 수 있는 것은 이 세상을 아름답고 밝게, 희망적으로, 긍정적으로 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
나의일기 Feb 05 2010 아침
새로운 하루를 연다, 벅찬가슴으로 또 하루를 맞는다. 오늘은 어떠한 일들이, 만남이 있을까?
미지의 세계를 여행 하듯이 새로운 시작을 하는 초심으로 나는 다시 하루를 연다. 우리에게는 누구나 24시간이 주어졌다, 저축 할 수도 없고 붙잡을 수도 없는 이시간은 우리에게 또 하루를 선사 한 것이다. 미지의 하루가 마치 마법의 상자를 열듯 우리앞에 있는 것이다. 얼마나 흥분되는 시작인가? 오늘은 어제보다 더 낳은, 그리고 새로운 하루를 만들기 위해 과연 나는 무슨 계획을 세웠고 준비 했는가?
오늘은 오랬만에 사랑에 빚진 사람들과 연락을해 그들에게 놀라고, 흥분되는 시간을 주어야 겠다. 나의 Mission을 되새겨 보고 얼마나 나의 임무에 충실 했었나 점검을 해보아야 겠다. 나의 vision은 얼마나 바래 있는지? 아니면 새싹이 돗아나고 있는지? 그것에 걸맞는 생활 습관에 벗어나 있지나 않은지? 나의 인생의 지도를 펴놓고 점검 해봐야 겠다.
오늘은 배우고 싶은것들을, 좋은 책들을 찾아보자? 나자신을 돌아보며 사람답게 살아가는 교양의 살이 찌도록 영양 공급은 잘하고 있는지? 변화에 충실이 대처하고 있는지? 훈련에 열심히 임하고 있는지? 혹시 잘못된 습관에 젖어 안일한 늪에서 허우적 대고 있지나 않은지 점검도 해보아야 겠다.
아직 동이 트지는 않았으나, 아침의 향기가 몰려 온다. 새로운 하루를 허락해 주신분께 감사하며, 나에게 주어진 모든 조건과 환경을 허락 하심에, 특히 아내와 아이들 가족들을 주시고 또 직장과 모든 만남의 허락에 감사 한다.
새로운 벅찬 하루의 시작점에서, 마라톤의 출발점에 서서 다시 신발 끈을 힘차게 묶고, 새로운 각오로 하루를 시작한다.
오늘도 구일신(荀日新) 일일신(日日新) 우일신 (又日新)하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새로운 삶을 바라면 나날이 새롭게하고 또 날로 새롭게하라)
어느날 오후 강가에서… 2010년 10월 7일
강물이 도도히 흐르는 강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인생도 이렇게 끊임 없이 흘러 가는구나하고 생각해 본다, 아마 나이 탓이 아닐까? 젊었을때는 아무 감정없이 바라보던 강이 아니었던가! 강이니까 물이 흘러가는 것이라고. 당여히 그래야지 하고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이강을 바라보며, 이강이 흘러 바다로 가겠지.. 그래서 모인 바다물은 여러모양으로, 파도로도, 깊은 심연으로도,잔잔한 물결로도,폭풍의 거센 노호의 파도로변하기도 하다가 증발해 구름이 된다. 이구름은 언제 어디에 선가 비로 변해 떨어지면 잎도 만들고, 꽃도 피우고, 동물들이 내려오는 옹달샘도 되고, 우리를 씻기는물 , 음식을 만드는 물, 빨래를 하는 등 여러 가지를 하다가 흙속에 묻혀 있기도 하고, 지하수가 되기도 하고, 다시 구름이 되기도 하고, 결국은 다시 강으로 와 다시 바다로 간다.
이 물이 없다면 이 지구는 아무것도 살아 있지 않겠지, 하나님은 이 물을 얼음으로, 구름으로, 끓는 물로 변화 할 수 있도록 허락 하지만 이지구는 벗어 날 수 없도록 갇어 놓았다. 왜냐하면 이 지구의 생명들을 지키기 위해서. 그들의 필요 불가결한 물과 공기는 이 지구를 벗어 날 수 없도록 은총을 베푸셨고, 그것이 사랑이며 이자연의 법칙으로 만드신 뜻 이시리라.
우리는 이 자연의 현상을 바라보며, 부처님의 윤회설을 조금이나마 이해를 해본다. 이자연은 돌고돈다 씨가 썩어 나무가 되고 꽃이 피고 열매와 씨가 생기고, 낚옆이 되고 진다.
구름이 비가되고 여러가지 역활을 하다가, 궁극적으로는 바다로 모이듯, 우리 인생은 부모에게서 태어나 자식도 낳고 여러 가지 활동을 하다가 생명을 다하면 흙으로 돌아간다. 그러나 내가 뿌려놓은 씨앗은 자식이던, 사랑이던, 사회에 남겨놓은 일과 봉사이던 그것들이 메아리 치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면서 생명을 이어 간다.어떤 세대는 대가 끈키고, 일들은 더이상 발전하지 못하겠으나, 그들의 영향에의해 새로운 Paradigm을 형성하는 역활을 하면서 역사는 흘러 간다. 어디로? 하나님이 이끄는 곳으로 가겠지! 이 과정 속에서 너와 나는 나름의 역활을 다하고 돌아 가는것.
잘살았다는 것과 잘못 살았다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놓은 잦대 일뿐, 우리는 이 커다란 흐름의 역사의 장에서 각자의 몫을 다하고 갈 뿐이다. 구름이 비를 내릴때 그 물이 어떠한 역활을 할지는 비 떨어지는 순간에 결정되어 지는것(운명이라고나 할까?)., 홍수로 집도 생명도 앗아가기도 하고 , 가믐이 한창인 마을 밭에 떨어져 그들을 살릴 수도 있고, 깊은산 한가운데 떨어져 아름다운 야생화를 꽃피우며, 지나가는 등반객의 가슴에 즐거움을 안겨 줄 수도 있는것.
물이 증발해 올라갈때는 어떤 역활을 하겠다고 할 수 없듯이, 구름은 바람에 날려 어느곳에 언제 비를 내릴지 모른다, 그러나 물로써의 역활을 하고는 바다에 모인다, 우리인생도 구름과 같이 어떻게 불려 나가 어디에서 무슨일을 할지 모르는 인생, 그러나 결국은 죽음의 바다에 모두 모인다.
이왕이면 가믐에 고생하는 마을에 떨어져 반가운 손님이 되거나, 야생화를 피워 지나가는 길손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비가 되었으면 한다. 우리의 인생도 주위에 사랑으로 밝음을 선사 할 수 있는 삶으로 살다가 돌아가는 인생이 었으면 좋겠다.
노을 2009 8월 18일
노을하면 우리에게 와 닿는 아련함과 안타까움이 있고, 마지막에 지는 황혼의 아름다움과
장열한 파노라마가 연상이 된다.특히 바다(호수)와 산이 어우러진 멋진 풍경위에 외로이
서있는 노송, 하늘에 나는 갈메기, 돛을 내린 돛단배의 조용한 정박, 모든것이 고요하고,
평안함과, 하루의 끝을 맞이하는휴식의 상태에 돌입하는 순간의 시간을 응시하며, 아쉬어
하는 안타까움의순간이다.여명의 순간은 너무나 빠르게, 아쉽게 지나간다. 그러나 해가
떨어진 후의 노을은 우리의 아쉬움을 달래느라 어느동안은우리에게 빛을 남겨 주고 서서히
사라진다. 자연이 우리에게 주는 자비 인것이다.
우리는 60이 넘어 이제는 황혼의 삶에 들어 왔다고 흔히들 말을 하지만, 정말로 황혼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지?: 얼마나 주위에 황혼의 아름다움과 아쉬움을 남기는 삶을 살아 가고 있는걸까?
우리의 삶이 자식들에게, 친구와 친지들에게 아련함과 안타까움을 그리고 황혼의 아름다움과
장열한 파노라마의 인생을 보여주며 살아가고 있는 걸까?
황혼의 아름다움을 가리는 저녁은 구름이 잔뜯끼인 저녁이다. 우리는 늙은이의 고집과 반복되는
자신의 자랑거리들로, 옳고 그름의편견속에서 주위의 먹구름이 되어, 아름다운 황혼을 가리는
생활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하고, 자신을 돌아보며 성찰의 삶을 살아가야만 하지 않을까!
오늘 여름밤의 지는 황혼의 태양을 바라보며, 여름의 가장좋은 때는 바로지금, 저녁의 시간이라고
본다. 아름다운 색갈이며, 뜨거운 열기를 발하던 태양이 저넘어 서녁의 지평선에 기울며, 붉은
빛을 발하던 해를 이제는 직접 바라보아도 눈이 부시지가 않다, 이제는공기도 식어져 선선함을 느낀다.
우리는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따듯한 차나, 시원한 과일을 즐기며.. 그저 이자연을 느끼기만 하면
편안함과 고요함이 우리의 가슴에 스며든다.
나의 인생이 이황혼의 편안함을 주고있는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과연 나는 인생의 어느 시점에
와 있는지? 다시금 되새기는 오늘저녁, 나는 나의 황혼의 삶을 뒤돌아 본다
여름밤의 아름다움은 은은함과 시원함 속에서 우리를 편안하고 고요히 휴식할 수 있는 시간을
주는것 같다, 우리 황혼의 인생과 시간도 그것에 걸맞는 성숙함과 고요함이 있어야 겠다.
편견과 아집으로, 패배와 열등감으로 꽉 막혀 바람도 통하지 못하는 벽과 같은 나가 되어답답한,
찌는 더위의 여름밤이 되어서는 않되겠다.
오만과 자만이 넘치는 삶 속에서 자신을 과시하려는 욕망의 삶으로, 아직도 나의 삶에서
가시지 않는 더위를 몰아 잠못이루는 여름밤을 만들고나 있지 않은지..? 아직도 밝음을
과시하느라 황혼의 부드러운 햇살 대신, 뜨거움과 눈부셔 바라볼수 없는 저녁노을로
멋대가리 없는 민밑한 저녁 으로 모두를 실망시키고나 있지 않는지?
이여름 밤 나는 지는 태양을 바라보며 자연이 나에게 말하는 목소리를 가슴으로 느끼며 삶의
지혜를 엄숙히 듣고, 성찰의 시간을 통해 남은 나의 생애를 어떻게 살아 가야 하는지 다시금
숙고해 본다.
사랑이란 2012 년 1월 20 일
어제 밤에는” 사랑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하나?”라는 제목으로 우리집 사람과 토론을 했다. 우리의 대화는 늘 그렇틋 서로의 의견과 입장을 주장 하다가 상대방이 자기의 기대에 못 미치는 반응 속에 실망과 허탈로 끝나기 가 일 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서로가 부부라는 이유로 상대방이 나를 특별하게 (남들과는 조금 다른 특별 대우를 받기를 바라는 마음) 대해 주기를 바란다. 즉 조건과 옳고 그름에 관계없이 나의 편이 되어야 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 너 마져 그러면 나는 누구를 의지 하고 이세상을 살아가느냐! 너는”나를 버리고, 나를 배반한 사람” 취급을 당하기가 쉽다.
우리의 입장은 이렇게 달랐다. “사랑은 주는 속에 의미가 있고 받으려는 기대는 욕심이다” 라는 것이 나의 입장이 었고, Wife의 의견은 “나는 사랑이 없는 사람이며, 자기를 사랑하는것 같아 보이지가 않으며, 사랑을 할 줄 모르는 사람, 아니면 사랑이 무엇인 지도 모르는 사람으로 자기는 여태것 나에게서 사랑을 받아 보지 못 한 것 같으며, 진정 자기를 사랑이나 하는 것이냐?는 것 이었다.” 그리고 나의 정의 속에서 앞으로는 사랑을 잘못 알고 있으니 고쳐서 생각하고, 반성하며, 계속 노력 해야 하는데 그런 기미가 전혀 없어 섭섭 하고 불행 하다는 이야기 였다. 그리고 나는 사랑을 필요로 하지도 않고, 혼자 사랑없이도 잘 살 거라는 이야기 였다.
정말로 사랑은 무엇일까? 나는 그져 존재 하는 것이라고 했고, 하나님 자체가 사랑이라고 했다. 사랑은 커다랗게 보며 주어야 한다고 했다. Wife는 사랑은 같이 있는것, 서로 대화 하는것, 관심을 갖는것 이라고 했으며, 나는 자기에게 관심도 없고 같이 있기를 피하고, 관심을 전혀 주지 않으며, 혼자 잘 노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대화는 상대방의 의견을 듣고 그의 생각을 완전하게 이해 하는것, 그래서 상대방의 생각에 나의 편견을 버리고 다시 확인 하는 과정이 필요하며 그 속에서 입장이 다른 상대방의 속으로 들어 갈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생각과의 차이점을 알아내고 분석해 모든 Fact를 꺼내 놓고, 벌려 놓고 서로 그 차이점을 확인하고 인정한다. 이때 감정이 섞인 표현은 상대의 마음의 문을 닫는 첩경이 될 것이다.
대화의 목적이 만약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상대 방을 유도 하고 싶다면, 대화에서 꺼내 놓은 모든 Fact를 놓고 하나 하나 서로의 차이점 속에서 어떻게 서로의 양보와 합의를 통해 Synergy를 만들고 새로운 Paradym을 형성 해 갈때 서로 Win Win하는 새로운 세상과 삶을 만들어 갈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나의 의견이 일방적으로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고 섭섭해 하는 감정을 나타내거나, 상대 방에게 일방적으로 나의 의견을 받아 들이기를 강요 한다면 쉽게 합의가 되지 않을 것이며 만약 상대 방이 Accept 한다고 한들 마음에서 우러 나온 행동으로 과연 바뀌일 것인지는 의심이 가는 바이다.
대화와 나의 의견의 관철은 어디 까지나 별개의 것이다. 이것을 한꺼번에 버물어 버린다면 생산적이거나 긍정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힘들 것이다. 대화는 모든 Fact들과 각자의 생각을 내어 놓는데 까지 만으로 감정과 자신의 목적과 원하는 바를 가미 시키지 않은 상태에서 상대 방과 나의 충분한 의견 교환 후에 차이점과 공통점을 열거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나의 의견의 관철은 감정의 표현 없이 내가 원하고자 하는 그림과 목표를 상대 방에게 정확하게 전달 함으로써 오해 없는 목표에 도달하게 될것이다. 서로의 입장과 의견의 차이가 커 있을 경우는 중간 점을 잡거나, 도저히 합의 점을 찾을 수 없으면, 그 합의는 없었던 것으로 감정의 개입 없이 결론을 낼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자신의 방향으로 끌고 갈 수 없어 섭섭해 한다면 결코 다음의 대화가 없을 지도 모른다.
우리는 이렇게 대화를 하며 살아간다. 사람들과 사람들은 대화라는 Channel을 통해 의견을 전달하고, 자신들의 삶을 발전 시키기도 하고, 자신이 얻고자 하는 것을 얻기도 하고. 상대 방에게 베풀기도 하며, 행복하게, 혹은 불행하게 살아 가기도 하고, 때로는 대화가 없는 공허한 생활을 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 대화의 기술을 어떻게 기르느냐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풍요스럽고 살찌게 할 수 있느냐의 척도가 될 수 도 있지 않을 까 생각한다.
그럼 다시 앞으로 돌아가 과연 사랑이란 무엇일까? 나는 하나님 이라고 생각하고 존재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으며, 사랑은 주는 데 그 의미를 둔다고 했는데. 이 세상이 모두 한가지 색갈만 있다면 얼마나 지루 할까! 이 세상에 꽃이 모두 장미라면 어떨뻔했나? 겨울을 벗어나는 매화가 없었다면, 봄의 화사한 벗꽃을 피지 않는 다면, 가을이 하늘 하늘 한 코스모스가 없고, 싱그러운 국화가 없었다면 이 세상은 정말로 지루한 곳이겠지.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우리에게 들 꽃까지 수만 종의 꽃들로 우리를 지루하지 않게, 계절마다 새로운 꽃으로 선물 하시고 보여 주신다. 이 얼마나 놀라운 사랑의 표현 일까? 각 가지 나무들이며, 들짐 승들 과 새와 물고기등 여러 종류와 목적을 위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은총과 사랑인 것을 우리는 매일 보고 느끼고 살아간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같은 재료인 땅 과 물 과 공기와 해 라는 4가지의 원료를 가지고 재주를 부리 셨다. 훌륭한 예술가 이시며 창조하시는 하나님. 씨앗과 열매, 난자와 정자의 Creation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의 생명력을 가진 주님 만의 작품이며 신비 인 것이다. 이것이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즉 이 우주 만 물에 존재 하는 것이 모두 사랑이며. 우리는 무한이 받은 이 사랑을 우리의 마음 과 손으로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더욱 더 욕심을 내고 더 받기를 바라기 보다, 달이 태양의 빛을 받고 주위에 빛을 발하듯 우리도 받은 것을 발 하며 반응을 하는 삶이 되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아내를, 자식을, 부모를, 친구와 주위의 사람들을 선물로, 주님의 사랑으로 선사 받았다. 우리가 노력한 것이 없다, 우리는 그져 우연히 그 곳에 있었고 주님이 주시는 우연의 만남 속에 나만의 여정과 삶의 과정 속에서 각자의 삶 속에서 서로 만난 사이, 어떻게 보면 기적과 같은 순간이 맺어 놓은 인연 들이다.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일들로 가득찬 삶이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우리의 몫을 가지고 이렇게 우리의 삶을 살아간다. 이 연결 고리가 사랑이 아닐까? 왜냐 하면 하늘이 맺어 주었고 그 뜻에 따라 살아 가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면 우리가 이야기 하는 사랑 즉 서로 보고 싶고, 헤어지면 않될것 같았던 사랑은 무엇인가?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러한 종류의 사랑은 길어야 3년 아니면 1년 안에 사라지며 다시 오지 않는다고 한다.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서로간 인간의 정이라고 하는 사랑은, 서로 이해 하고 돌보고 보호 해 주고 감싸 주고 싶은 사랑은, 함께 하는것, 옆에 있어 든든하고, 기대고 응석도 부리고, 하소연도 하고, 들어 주고, 같이 슬퍼하고, 즐거워 해 주는 사랑. 이 사랑은 어떻게 보면 위험 할 수 도 있다. 주기만 하고 받지 못 하는 속에, 그리고 기대에 못 미쳐 섭섭 할 수도 있고, 서로 너무나 익숙해져 있어 당연함 속에서, 너무나 편안 함 속에서, 마치 공기와 같이 없어 져서야 아쉬워 할 수 도 있다. 또한 친구와의 관계나 친척간의 사랑은 계산?이 전혀 개입 되지 않는 상태 이어야 하지만, 서로의 이해 관계 없이 순수한 사랑 만을 부르 짖기에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관계의 사랑 나누기란 서로 얼마나 감정의 은행 잔고의balance관리를 잘 하며 지속 해야 하는 관심을 필요로 한다. 이 선을 넘어선 우리의 관계들은 out of site out of mind라는 철학의 선상에 있지 않나 생각한다. 물론 종교에서나 철학에서 이야기 하는 인류애를 발휘하는 사람들을 대하면, 그들의 사랑은 주님의 사랑 같이 위대하다. 우리는 그렇게 해야 하고 미치지 못함에 미안함 마져든다.
성경에서 이야기 하는 사랑은 고린도 전서 13 장에서 나타나듯 인내, 온유, 절제, 겸손 … 과 같이 이세상을 살아 가는 우리의 태도를 성인의 모습에 가까이 닮아 가라는 가르침이다. 불교의 사랑은 자비,욕심을 버리고, 중생들에게 베풀고 빈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라는 저서의 저자인 버스카 글리아 씨의 사랑의 정의는 우리는 우선 자신을 사랑하고 많은 것을 익히고 배워서 자신을 풍성하게 만들고, 그것을 주위의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누어 주고,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사랑하라. 즉 이 세상의 어느 누구도 사랑을 받을 권리가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서로 다르게 태어 났으니, 서로 존중하고, 나누고, 함께 살아 갈 때 이 세상은 풍요로운 곳이 되고, 사는 맛이 나는 것이다. 즉 주는 것이 사랑이다.
이렇틋 사랑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정 과 애틋함 같은 핑크빛 같은 사랑의 정의를 넘어 많은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그렇다고 이 핑크빛 사랑은 너무나 좁은 의미이며 옹졸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이 인생을 살아가며, 가까운 사람들끼리 서로의 따뜻함이나 관심과 배려가 없다면, 다른 이들과의 관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서로 이해 하고 돌보고 보호 해 주고 감싸 주고 싶은 사랑은 함께 하는것, 옆에 있어 든든하고, 기대고 응석도 부리고, 하소연도 하고, 들어 주고, 같이 슬퍼하고, 즐거워해 주는 사랑. 이 사랑을 우리는 기대하고 살아 간다. 그러나 주기만 하고 받지 못 하는 속에, 그리고 기대에 못 미쳐 섭섭 할 수도 있고, 서로 너무나 익숙 해져 있어 당연함 속에서, 너무나 편안 함 속에서, 마치 공기와 같이 없어 져서야 아쉬워 할 수 도 있다. 이처럼 우리는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해도 이 사랑을 확인 하고 소유 하고 싶은것, 그러나 사람마다 기대와 성격이 다르다 그래서 세상 살아가며 대화가 필요 한것. 우리는 서로 사랑하고 있지만 표현이 틀리고, 기대가 틀리고 방법이 다르다. 사랑이 없는 사이라면, 매사 마다 자신의 이익과 이득실을 따질 것이고, 상대방의 의견에 전혀 무관 심하고, 배려할 필요가 없으며, 만약 사람의 사이에 사랑이 없다면 같이 있어도 매우 불편하고, 귀찮아 할 것이다. 서로 너무 편안하고 부담 없이 있을 수 있다면, 내가 무엇인가 필요 할 때 옆에서 도와 준다면, 내가 불편하고 아파 할 때 왜 그래 하고 물어 준다면, 맛있는 것을 서로 나누어 먹을 수 있다면, 니꺼니? 내꺼냐? 따지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서로의 득실로 실강이를 않는다면, 상대방이 잘 되면 같이 즐겁고 자랑스럽다면, 누군가가 그를 다치게 하거나, 욕보일 때, 내 마음에 화가 나고, 그를 보호해 주고 싶다면, 같이 여행을 계획하거나, 즐거운 Plan을 함께 대화한다면, 아이들을 위해 함께 걱정하고 의논한다면, 남은 인생을 함께 걱정하고 상의를 한다면, 이 사람들은 사랑으로 같이 하는 것이 아닐 까요. 입으로 사랑해 하며 말 하는 것도 중요 하겠으나 습관 속에 빈 껍대기로 공기만 울릴다면, 안으로 사랑하고 있음을 알지만 전혀 표현 하지 못한다고 사랑이 없는 걸까? 옆에서 답답은 하겠으나 묵묵한 사랑이 어떻게 보면 입 발린 겉치레의 사랑보다 더 깊이 있는 것이 아닐 까?
우리는 따지고 확인 하고 싶은 마음이 있고, 사람들 마다 자신만의 삶의 방법을 가지고 있지만, 자연은 그냥 그 곳에 있으며, 우리에게 심오한 진리를 말해 주고 있고,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을 표현 하고 묵묵히 그냥 있다, 이 것이 주님의 표현 방법인 것이다. 우리도 주위의 모든 것에 너무 집착하고 따지고 바라기 보다, 묵묵히 바라보며 느끼는 진실 한 삶 속에 빠져 보는 것도.. 주님의 사랑 방법을 닮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본다. 우리는 자신이 태어난 대로, 그 자신의 방법대로 살아가는 것에서, 서로가 다른것 나의 기대와 방법 만 가지고 혼자의 울타리 속에서 속상해 하거나 내 기대 만 고집 하기 보다는 서로의 대화 속에서 상대방을 이해하고 조금 씩이나마 상대방을 배려 해 주는 삶을 살아 갈 때 서로의 삶이 풍요로와 지고 같이 공존해 가는 지혜를 기르며 우리의 삶을 좀 더 풍요 롭게 살아 가야 하겠다.
사랑이라는 정의는 한마디의 말로 표현 하기에는 너무나 넓고, 깊은 의미가 있는 것인 것 같다. 그래도 인간은 사랑이라는 것을 이해 하려하고, 표현 하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 가는 것인것 같고, 그 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고, 표현 함으로써 인생의 맛을 알아 가는 것 이라고 생각 한다.
반성과 각오 2012 년 10월 15 일
나는 과연 어떻게 남은 생을 살아가야 하는 걸까? 요번 여행에서 세 번째 미국대통령을 지낸 Thomas Jefferson의 집을 방문하고, 그가 살아온 삶의 자취를 들으며, “나는 너무나 안일 한 생각으로 나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는 많은 재능과 유산을 갖추고 있었으나, 그 보다 도 그의 삶은 끝없는 노력과 새로운 진실을 알기 위한 도전의 연속이었다 ; 건축학, 법학, 정치와 사람들의 net work 구성에서, 농사에 이르기 까지, 이 세상을 좀더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그는 끝없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며, 도전을 했으며, 실천하고 이루어 놓았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 셋을 키우고, 그들이 이제 제법 자리도 잡히고 장가도 가고 손주도 낳고, 각자 밥벌이도 제대로 하고 있다고 만족하고 있고, 그동안 모아 놓은 재산이 이제 여생을 살아가는데 크게 어려움 없을 정도라고 만족하며, 이제 부터는 취미 생활을 하며 여행이나 다니고, 자식 손자들이 사는 것을 바라 보며, 남은 여생을 편하게 살기 위해 집도 줄여 정리하고, 더 이상 손볼 필요가 없는 Condo나, 아주 작은 정원이나 가꾸는 곳으로 이사하고, 모아 놓은 재산은 Investment Company에 맡기고, 노후의 삶에 필요한 수입이 들어 오도록 해 놓고, 이제부터 늙어서 죽어 가는 연습을 하고 있다. 이 얼마나 나약하고, 힘없고, 재미 없는 삶을 계획하고 있는 것 일까? 이렇게 ‘나의 남은 시간과 재능을 매장 하고, 썩어 지도록 가두어 놓고 있는 것’이 나의 노후의 삶의 계획이며, 후세들에게 해 주어야 하는, 주님이 원하는 나의 여생을 살아가는 방법이란 말인가?
젊은이 들에게 꿈을 심어 주고, 새 삶을 개척하도록 정신적 지주가 되겠다던 나의 꿈을 그들은 귀를 기울여 들어 줄건가? 나는 안일한 늪에서 허덕이는데 말이다. 그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어떠한 열정을 심어 줄 수 있단 말인가? 내가 축쳐져 있는데 말이다. 나의 삶을 바꾸어야 한다. 끝없는 도전은 계속 되어야 한다. 집도 새로운 설계로 계속 바꾸어 가야만 한다. 새로운 농사도 시도 해야 하고, 정원도 새롭게 가꾸어야 하고 계절 마다 새로운 꽃을 피우도록 만들어야 한다. Golf도 계속 해서 발전 되어야 하고 젊은이들을 능가하는 실력을 쌓아야 한다. 낚시도 새로운 방법을 시도 해야 하고, Fly 낚시도 새롭게 시작해야 하며, 새로운 도전과 방법을 찾아야 한다. 악기도 끝없이 도전 해야 하며, 최고의 경지에 이루도록 경주 해야 하며, 끝을 보아야 한다. 한인들에 대한 실망도 극복하고, 우리의 문화와 얼을 이곳에 심어야 하고 끝없는 도전은 계속 되어야 한다. 새로운 공부와 도전을 끝없이 추구하며, 새로운 Technology에 뒤지지 말아야 하며, 현실에 안주하고 만족한다는 안일한 생각에 고인 인생이 아니요 항상 흐르고 맑은 소리를 내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
오늘은 또 하루가 아니요, 새로운 하루의 삶으로 흥분되는 하루가 되어야 한다. 오늘은 무엇을 새롭게 배울 것인가? 또랑 또랑한 눈동자로 호기심에 찬 시간들로 가득 채워야 한다. 특별한 계획과 Vision이 꼭 있어야 만 하는 것은 아니지만, 깨어 있는 순간들로, 새로움으로 가득찬 호기심의 열정과 기대로의 시간들이면 족하다.
나는 남은 삶을 이렇게 살아 가는 것이 나의 여정이라고 이야기 하고 싶고, 나의 잘못된 생각을 반성하고, 새로운 각오로 출발 하고 싶다.
삶의 성찰 2016년 3월 29일 유 광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자신의 의지로 태어 나지 않지만, 또한 죽음이라는 마지막 단계도 또한 자신의 선택대로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삶은 어느정도 의지에 의해 선택된 삶을 영유해 간다. 우리는 태어난 환경에 커다란 지배를 받고, 교육의 영향으로 그리고 커가는 과정에 친구와 읽는 책, 신앙생활등의 영향으로, 그리고 결혼 생활, 가족과 직장 생활들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과 믿음이 생겨나고 신념이 싹트고 이것을 삶의 선택에 적용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 삶은 옳고 그르고도 아니고, 누가 더 잘 살았다고 평가할 잦대도 없으며, 각자가 다른 삶의 경로를 선택 했고 주어진 여건이 그렇게 허락 해 왔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삶을 선택하고 살와 왔건 죽는 다는 것이다. 종교들은 내세의 평안을, 그리고 영생과 천당을 허락 하지만 누구도 죽음의 순간을 마지하는 마지막 과정을 편안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마지하도록 약속하지 않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도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많은 종류의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들은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만 고통없이 앓다가 저 세상으로 주님의 품으로 돌아 가기를 바란다. 아마 100세 시대로 들어온 새 세대는 120세 까지로 변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오래 산다는 것이 좋을까, 만약 고통과 인간의 존엄성을 잃은 그져 생명의 연장이라면? 과연 이것이 우리의 소망일까? 우리는 죽음은 인정하지만, 그사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정말로 내가 원하는 죽음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생각기를 피하고 있다. 나에게는 조금 더 여유가 남아 있고, 아직도 먼 뒷날의 이야기 이라고 믿으며, 어떻게 닥쳐 올지도 모르는 것으로 미리 상상하고 걱정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미리 자신의 마지막 단계를 어느정도는 대비 하고 준비해 놓아야 한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때 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독립적으로 자신의 일상을 돌보고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이며 이상적인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유지 할 수 있는 건강과 부가, 우리의 마지막의 과정에 들어가는 각자들의 Retirement Plan인 것이다. 그냥 오래 살기를 바라기 보다 건강하게 독립적인 삶을 유지하는 기간이 긴 삶을 원한다. 그래서 우리는 건강을 위한 식사와 운동을 꾸준히 하고 절제된 삶속에 자신을 살아 있게 만드는 활력과 사회 생활 취미 생활을 즐기며 산다. 그러나 언젠가는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무너져 내리는 때에 자신의 고통과 수치심의 삶을 돌보아줄 Institution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해 내기위한 경제적 능력을 가추어, 그 기간이 짧으며, 편안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이것이 누구나가 다 바라는 삶을 마감하는 과정의 소망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이것을 마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우리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있는 공동체의 일원인 것이다. 우리는 그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친구가 되고 각자가 맡은 역활을 하며 살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가족들은 나의 죽음에 슬픔과 그리움을 가질 것이고 친구들의 아쉬움과 사회에서의 빈 자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 없이도 아무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 그러면 죽음은 왜 심각한 문제 일까? 아마도 우리가 만든 심각함이지, 그저 이세상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 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나의 죽음은 잊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일상 생활을 해 나갈것이다. 작은 돌이 수면에 떨어져 작은 물결을 만들지만 곳 사라지듯이 나의 죽음 또한 이 세상의 삶에 한 물결이 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개인으로 볼때 죽음은 이렇게 간단 하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받아 들이기에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질병과 노화와 공포는 단지 우리가 감내 해야 하는 고통과 상실에 대한 두려움 만은 아니다. 그것은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 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터 그다지 많은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한 이 세상에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이 생명을 연장하는것 말고도 해야할 중요한 일들이 많다.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 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 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의사들과 주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얼마나 알고 이해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사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환자들이 그들을 압도하는 불안감에 잘 대처 하도록 돕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불안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안감, 돈에 대한 불안감등 말이다. 의사는 환자와 그 가족이 X나 Y중 어떤 치료법을 원하는지 알기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마음의 결정을 하기전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꼭 물어야 할 질문은; 병의 예후를 어떻게 이해 하고 있는지? 앞으로 일어날 무엇이 염려 스러운지? 기꺼이 희생할 용의가 있는 것이 무엇인지? 건강이 더 악화되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 할 상황에 이르면 누구에게 그걸 대신 하게 할 것인지? 등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각자 이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해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가 피 할 수 없는 언제 닥쳐 올지 모른는 현실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이 상황에 처 했을때 당황하지 않고 대쳐 할 수 있다. 우리는 적어도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틀림없이 찾아온다. 언젠가는 우리 몸의 쇠락은 덩굴이 자라나는 것 처럼 진행이 된다. 그리고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어느 할머니 처럼 자다가 슬그머니 돌아 가셨다는 소망을 가지고 기도 하며 살아 가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에게만 오는 축복이다. 그 망상 속에 준비 없이 당황하는, 그리고 고통속에서 동물원의 짐승처럼 타락된 Senior home의 중환자 실에서 쓸쓸하고 외로운 마지막의 시간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는 다면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를 상실하지 않는, 나만의 ‘Home’에서 지내기를 소망하지만, 그러나 Senior Home으로 옮겨가는 순간 포기 할 수 밖에 없는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 상태에 처한 노인들이 잘 살아가도록 : 중요한 관계와 기쁨을 어떻게 하면 유지 할 수 있는지를 돕는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 했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질병과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 공학적 실험 기간들이었다. 그 실험은 실패 했다.
이제는 노인화 사회에 들어 스면서 누군가에게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유지 하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들을 한다. 자신의 영역과 주권이 주워진 주거 지역을 만들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되, 항상 옆에 의료진과 간호사들이 있어, 본인이 원하고 필요한 때에 항상 도움을 줄 수있는, 독립적인 삶을 존중한 주거지와 service의 노인 들의 공간을 ' Assisted Living Concepts' 라 한다. 이 concepts은 윌슨이 남편과 함께 어머니의 문제를 배려해 시작한 성공적인 Senior Home 이 었고 초기엔 누구도 이해가 되지 않아 어려움으로 출발 했지만, 막상 시작하고 나니 매우 성공적인 인기 속에 2차 준공을 했다. 그리고는 계속해 인기 폭팔로 증축이 필요했고, 돈이 필요 했다, 그래서 회사를 상장해 Wall Street에서 자금을 끌어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같은 Concept으로 우후죽순 같이 노인 요양원으로 만들며, 노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돈벌이 하는 institution으로 전락해 버렸고 Wilson이 만든 요양원도 주주들의 거센 반발에 초심의 노인을 위한집에서 가족이나 요양원이 원하는 이익의 집단으로 탈락해 버렸다. 그래서 Wilson은 주식을 모두 넘기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돈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딴 ' 제시 F 리처드슨' 이라는 제단을 만들어 노인을 돌보는 일을 돌보며, 탈바꿈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토머스 체이스는 젊은 의사로써 처음으로 요양원에 부임 했을때, 그 곳은 생명이 모두 사라진 늙고 시들은 불구자들의 집단 이었다. 치매와 지팽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간호원들은 그들을 돌보는 일들을 하나의 직업적인 의무로 생각 했고, 고통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는 반시체 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통 스러웠고, 이 속에 생명을 다시 불어 넣어, 죽는 그 순간 까지 좀더 삶의 가치를 잃지 않는, 인간의 고귀한 삶으로 탈바꿈 해야 겠다는 의지 속에, 이 곳을 개혁 하고자 혁명을 이르켰다. 즉 외부의 생명체를 이 곳에 투입해 그들과 함께 생명력을 되 찾자는 것이었다. 개들과 고양이를 키웠고 각 방에 카나리아새를 넣어주워 함께 살도록 했으며, 채소밭을 만들고 모든 Artificial flower들을 진짜로 바꾸어 물주며, 가꾸도록 했다. 반시체였던 노인 환자들의 생명들이 되살아나기 시작 했으며, 약처방이 줄어들었고, 사망율이 현저히 줄어 들었다. 이렇틋 인간은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증명이 된 셈이다.
위의 두가지 예의 사실들만 보더라도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닥아옴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법은 가능하며 좀더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잃지 않고 유지하며,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통해 편안 하고 고통이 없는 이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성찰해 보면서, 이제 70을 맞이한 나의 삶의 Map위에서 그동안 지나온 발 자취를 바라보며 좀더 잘살아 올걸 하는 바보같은 물음은 사라졌고, 앞으로의 삶의 가치를 지켜 나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하며 계획표를 만들어 가야 겠다.
우선은 건강을 유지 하기위해 적절한 식사(Balance Diet)를 그리고 정규적인 운동, 그리고 사람들과의 소통과 사회활동을 그리고 소명을 위한 일(스스로를 넘어서는 대의의 추구)을 찾는 작업을 시작 해야 겠다 : 노인을 돕는일,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일,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이들을 돕기, 자연의 파괴를 막는일, 자연의 보호 ( 동물, 식물, 기타)등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때가 오면 내가 맞이할 마지막의 존엄성과 수치를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어떠한 용기를 내야 할까?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 즉 무얼 두려워 하고 무얼 희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있는 용기이다. 문제는 어떠한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 해야 한다. 우리는 대화를 통해 ‘종말이 가까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 해야할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로 넘어가는 시점이 온다 그 때 그 사람들은 이미 그 순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생이 마감된 후에 모든 사람들이 후훼없이 떠나가고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시작이 반이면, 이 순간또한 반을 차지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삶의 자취와 추억은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의 자취 뿐이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혀 지고 마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라 했던가 … !!
마지막까지 우리가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은 삶에 임하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한 생의 마지막, 모두가 바라는 것은 있습니다. 바로 고통 없는 죽음입니다. 평화로운 죽음, 이것이 우리가 바라는 마지막 삶의 페이지일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