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서전 ( 나의 인생 ) 2022 10월1일 시작하다
인생은 새옹지마라 했나, 돌고도는 인생이지만 한번 사는 인생이고 우리에게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시간들인 것이다. 우리는 이 시간들에 나름대로의 가치를 부여하고 있지만 감히 누구도 더 잘 살았다고 아니라고 할 수 없지 안나 생각되어진다, 그냥 다른 삶의 모양인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강물을 보며 어떻게 잘잘못을 이야기할까? 잔잔히 흐르기도 하고, 범람하여 무섭게 흐르다 가도 가뭄에 바닥이 보인다, 어디에 가치를 둘까? 이 강물은 주위의 초목을 적셔 초목이 무성 하게하고 들꽃을 피워 지나가는 사람들의 휴식처가 되기도 하고, 범람하여 산사태도 일으키고 집도 부수고 나무를 뿌리 채 뽑아 버리기도 한다. 사람들의 목숨도 앗아가는 죄도 범하고, 모인 물들은 발전을 해 많은 사람에게 전기를, 또한 농촌의 농수로 농사에 많은 혜택을 주기도 한다. 그리고 가뭄에는 바닥까지 말라 아무 쓸모 없게도 된다. 이것은 모두다 자연의 현상이며 섭리였으며, 흘러가는 강물이었고 그 순간에 그냥 충실하게 흐르고 끝으로는 바다에 모여 그의 여정을 마친다. 시작은 작은 물줄기였고, 점점 계곡으로 협곡으로 흘러 폭포를 만들기도 하다가 작은 호수로 모여 잠시 머물기도 하고 강물로 흐르며 마을도 지나고 도시도 지나다가 결국은 바다로 모인다. 이 물줄기는 어느때가 더 가치가 있었는지 우리는 헤아릴 수 없다 물줄기로 시작해 바다로 간 생인 것이다. 이렇게 각 물줄기 마다 나름대로 다른 모습으로 흘러 바다로 온 것이다. 우리의 삶은 각자 다른 모습과 과정을 따라 가다가 죽음이라는 종착점에서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나는 오늘 조용히 나의 삶의 길들을 돌아보며 나의 삶을 정리 해 보고싶어 이렇게 시작해 본다. 나는 어떤 뿌리에서 태어나 어떤 모습으로 자라고 살아왔으며 어느 여정을 지나, 어떠한 꿈을 꾸며 살다가, 어떻게 너머지고 일어나며 살아왔으며 어떤 것을 이루고 어디를 돌아 이제는 어떠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인생을 마무리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나름대로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보고자 시작해 본다. 그 누구도 내인생이 성공적이었고 아니고, 잘 혹 잘못 살아왔다고 할 수도 없다. 나는 하나 밖에 없는 나의 삶을 이렇게 살아왔다는 여정을, 그 과정을 더듬어 알아보고자 할 따름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 아이들이 알아주었으면 한다. 이제 나이가 들고 나니 철이 드는지 인생의 가치를 찾기보다는 남은 생의 시간들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의 과제가 더 중요 한 것 같다. 이 나이에는 입는 걱정 먹는 걱정 없이 잠잘 곳만 있다면 그 이상은 별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물론 Billionaire 같이 호화로운 삶은, 물론 그들의 많은 자유와 엄청난 부를 보면 부러워 보인다, 반면 그들의 부에 얽힌 삶의 굴레와 버리고 떠나지 못하는 많은 짐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우리의 삶이 좀더 단순하고 자연 친화적이 아닌가 싶다. 우리는 결국 병들고 죽어 가며 이 모든 것을 놓고 가야 한다. 영국여왕도 그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누렸지만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갔고, 법정 스님도 무소유의 삶을 따르며, 정신세계의 풍성함과 자유를 누렸지만, 그도 한줌의 흙으로 돌아 갔고, 세상에서 서서히 잊혀져 간다. 나도 우리가 모아 놓은 재산과 인과 관계와 많은 지식과 지혜들을 언젠가는 놓고 떠나야 한다. 나는 어떻게 이세상을 떠나는 것이 과연 나 다운 떠남이 될까? 하고 생각하고 정리 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다.
나는 교육자 집안의 부모 밑에서 둘째로 태여 낳으며 어머니는 학교 선생님 이셨고, 아버지는 학계에서 일생을 보내셨는데, 이화여고 선생님, 이화여대 교수, 한양대 학장을 지내셨고 정부(박정희 대통령)의 부탁으로 최초의 국가 최초 체육대학을 설립하시고 그곳에서 은퇴하셨다. 그러시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석박사들을 양성하셨다. 교육자 집안은 경제적으로는 넉넉한 삶이 아니었으나 먹고 사는 것을 걱정하지 않고 무난한 생활을 했다. 위에는 누님 밑으로는 남동생, 여동생 2남 2녀의 형제자매가 있었고 아버님은 10남매 중의 장남 이셨고 어머니도 오빠 둘 언니들 모두 많은 식구들 속에 삶들이 였다. 두분 모두 강원도 라는 지역의 사람들로 한국에서는 감자 바위라는 지방 출신이며, 도시 보다는 조금 시골 냄새가 나는 출신 들이었다. 할아버지는 춘천에 인접해 있는 송암리 라는 조그만 마을에 농사꾼의 3번째 아들로 태여 나셨는데, 농사 짖는 것이 싫어 일찍이 농촌을 떠나 춘천에서 상업 학교를 졸업 하시고 외정 시대에 은행원으로 일하시며 재산을 모으셨다. 남 춘천에 500 평 정도 되는 집을 장만하시며, 많은 논과 산을 사서 모으셨으며 추수때는 마당에 쌀이 산같이 쌓이는 천 석군 이셨다, 할아버님은 큰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셨고, 막내딸, 아들까지 모두 서울에 있는 대학까지 뒷바라지를 하시는 경제적 능력이 있으셨고, 돌아가시는 날까지 경제적으로 독립한 삶을 사셨다. 나는 이렇게 많은 삼촌 고모들 속에서, 서울에서 장손으로 태어나 많은 사랑과 기대 속에서 자랐다.
나의 나이 4살 때, 한국에서 6.25동란이 터졌다. 우리 본가는 춘천이라 우리는 춘천으로 피난을 갔었는데 그곳이 더 안전하지 못했다. 그래 1.4후퇴 때 엄마는 아이들 셋을 데리고, 마침 놀러 와 있던 이종 사촌인 현숙이 누나와 함께 피난길에 올랐다. 우리는 춘천을 출발해 산을 넘고 들을 건너 마차도 얻어 타고, 자전거도 얻어 타고, 군인 truck에 올라타기도 하며, 갔지만 주로 많은 길을 걸어야 만했다. 한때 어머니는 누나와 같이 군인들의 쌀을 실은 Truck을 탔었는데, 인민군들의 습격으로 다리에 총상을 입고 Truck 에서 떨어져 며칠간 시골집에 머물어 치료를 받는 등, 어려운 고비 끝에 안동을 거쳐 대구 까지 도착 했다. 아빠는 이화여대 총장인 김환란씨와 이정애 여사와 같이 이화여대 이사를 도와 미리 부산으로 떠나셨었다. 아빠는 우리가 대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Jeep차를 가지고 오셔서 드디어 가족이 상봉을 했고 부산에 있는 이대 피난 임시 거처 에 안주해서 3년간을 살았다. 이웃이 모두 교수들 가족이었고 교수님들 아이들 이랑은 서로 왔다 갔다 하며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난다. 이렇게 고생 스럽던 우리의 피난길은 끝이 났다.
부산에서의 기억은 누나와 같이 이대에서 운영하는 유치원에 쫓아 갔다가 유치원을 2년간 다녔었고, 7살에 서울대학이 운영하는 부속국민 학교에 입학했는데, 그곳은 입학시험을 치러야 했고 경쟁률이 4:1이 였었다 내 수험번호는 45번이었고 갑오라고 조와 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함께 시험을 치렀던 교수님들 자제들은 모두 떨어져 나만 붙어 집안의 영광이었었다. 이렇게 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이화여대가 서울로 학교를 이전해 수복을 했고, 우리도 서울 돈암동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부산에 있는 동안 우리는 Shepperd라는 종의 개를 키웠었는데 나랑 많이 친 했었고 같이 놀았는데 어느 날 지나가던 마차에 치어 앓다가 죽었다. 죽는 날은 비가 많이 왔었는데 슬퍼 울던 기억과, 그날 이대 뒷산 언덕에 그를 묻어 주고 자주 찾아가 그리워 하던 기억, 엄마 생일날 우리는 모두 선물을 준비 했는데 내 동생은 앞에 있는 조그만 Mart에서 곶감을 한줄기 사서 두고는 생일 날이 돌아오기 전에 먹고 싶어 매일 한 개씩 빼어 먹어 막상 생일 날은 몇개 남지 않아 한바탕 웃던 기억도 난다. 이렇게 부산 피난 살이는 끝이 났다.
서울에 돌아와 새 이웃들을 접했는데 아랫집은 이발소와 구멍가게를 하고 있었고, 윗집은 아버지가 건축일을 하시는 분이라 자주 집을 비우셨고, 나보다 2살위인 형과 한 살 아래인 동생이 살아 자주 친하게 다녔었다. 한 Block 떨어져 서는 윤상근이라는 같은 반 아이가 살았고, 또 2 Block쯤에는 큰 고모부가 살아서 가끔 놀러가 그 집안의 고장 난 것들을 고쳐주던 기억이 난다. 나는 우리 동내에서는 꼬마 대장을 했었었는데 새로 아이가 이사오면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 힘겨루기를 해서 그를 이겨야만 했다. 그리고 윗집의 형 한태 야구를 배웠고 우리 동내 Pitcher로 활약 하고 있었으며, 이웃 동네아이들 이랑 야구시합을 하러 다녔었다. 우리 꼬마들은 동내에서는 집 잡기, 다방 구, 말 타기, 잣 치기, 다마 치기, 석돌 쓰러트리기 등 모두 자연에서 줍거나, 우리 몸을 쓰는 놀이들 이 였다, 가끔씩 을지로 4가 까지 달리는 마라톤, 상명상업여고 뒷산에 올라가 신설동 까지 산을 타고 갔다고 돌아오는 산행, 정릉은 개울 물도 맑고 물고기도 많이 있어 그곳에 놀러가 물고기도 잡고 수영도 하고 돌아오면 하룻길 이었고, 하루는 그곳에 우리 동네 아이 친척이 살고 있어 놀러가 염소 고기 먹던 기억, 물가에는 광목을 하얗게 빨아 말리던 곳, Cement Block을 만드는 아저씨들이 열심히 Cement를 비벼 틀에 넣고는 찍어서 Block을 하나씩 햇볕에 말려 쌓던 모습도 생각이 난다.
우리가 이곳으로 돌아온 다음 해에는 아빠가 교환교수로 미국으로 떠나셔서 Spring Field College에서 아동심리학 석사 학위를 받고 돌아 오셨는데, 그동안은 우리 셋은 나란히 을지로 5가에 있는 서울대학교 부속 국민 학교에 전차를 타고 다녔고,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전차를 타려고 길을 건너 가던 중 달려 오는 오토바이를 못 보고 그도 내가 그곳에 정차 해 있던 택시에 가려 나를 보지 못해 교통사고가 났다, 나는 머리가 깨져 3바늘 이나 꿰매고 집에 돌아가 엄마를 놀라게 했다, 덕분에 학교를 며칠 쉴 수 있었는데 아빠 한 테서 꿈속에 나에게 무슨 변이 난 것 같다고 연락을 하셔서 이 세상에telepathy가 있는 것 같았다. 1년후 아빠는 돌아오셨고, 이듬해에 우리 막내 동생 담이가 태여 낳다.
그러던 어느 날,이 조그만 한옥집에서 삼선교에 있는 일본식으로 지은 마당이 있고 정원이 있는 집으로 이사를 했는데, 다다미방과 툇마루가 있었고 방이 여러 개 있어 내가 독방을 갖게 되었다. 그때가 아마 내가 막 경복 중학교 입학했던 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해 봄 툇마루에서 꼬마가 경복 중학교 모자를 쓰고 사촌들과 찍은 사진이 있다. 부모님은 이집을 개조해 변소는 수세식으로, 옛 부엌을 덮어 마루를 깔고 그 위에 식탁을 놓았고 Sink대를 만들고 요리하는 table이 옆에 있었고, 부엌은 지하실이 되었다. 그리고 식당 밖을 나가면 옛날식 PUMP가 있었는데 바가지에 물을 담아 PUMP에 물을 넣고 몇 번 pump질하면 시원한 물이 펑펑 쏟아져 나와 여름에는 등 목욕도 하고, 김장철 허드렛일을 하던 물가와, 옆 부뚜막에는 가마솥이 있었는데 장작불을 짚 혀, 떡도 찌어 먹고, 소 머리 등, 국을 한 솥 끌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돌아서면 아궁이가 있었는데 그곳에 불을 집혀 가마솥 같이 생긴 목욕탕에 물을 끓여 온 식구가 차례로 목욕을 하곤 했다. 옛날 돈암동 집은 변소가 밖에 있어 광을 지나야 하는데 저녁이면 누나가 무섭다고 나를 밖에 망을 세우던 기억, 그리고 Tile로 만든 장독대가 있어 간장 고추장 된장 등이 저장되어 있었고 그 밑은 창고로 음식물 저장소였다. 조그만 마당이 있었는데, 그곳은 수돗물이 있어 물장난도 하고 빨래도 하고 생선도 Clean하던 기억이 난다. 방이 셋 밖에 없어 문간방에는 나와 남동생 그리고 이촌 사촌형이 함께 살았고, 사랑방에는 누나가, 안방에는 부모님 그리고 막내 여동생이 살았다. 안방 옆에는 부엌이 있었고 그곳에 가마솥이 있었는데 어느 날 장작불에서 연탄으로 아궁이가 개조되었고 우리 방 아궁이도 모두 연탄으로 바뀌어 따듯하게 지냈다. 전기는 가끔씩 들어오기는 했으나 초롱불로 살아 호 야를 신문지로 딱 아야 했고, 전기 다마를 이용해 양말을 꽤 메 주시던 어머님의 모습이 생각난다. 그리고 내방 책상 앞에는 못으로 결심이라는 글을 밖아 마음을 다짐했던 이집에서 나는 어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중고등 학교, 대학 입학 때까지 삼선교 집에서 보냈는데 마당의 잔디에 누어 부모님과 별을 보며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며 지냈던 기억, 어느 날 가을 우리집 마당에 감나무가 있었는데 감이 너무 많이 열려 가지가 부러졌다. 나는 그 감나무 가지에 달린 감이 맛있어 모두 먹어 버린 다음 날 부터 항문이 막혀 한 열흘 이상 고생했었다. 우리집에는 아빠가 사냥을 조와 하셨고 개도 조와 하셔서 많은 종류의 개가 있었는데 갈색, 검은색 Pointer, Weimaraner라는은빛나는 물갈퀴가 있는 사냥개도 있었고, 진돗개, Speech, Lash(코리)등 많은 개가 있었는데, 오히려 어머니는 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다. 개들을 위해 별도로 가마솥에 보리쌀과 시래기로 된장을 넣고 끓였는데 많은 개들을 먹이느라 별도의 일이었고, 마당에는 개들의 똥이 항상 쌓였었고 치우는 것은 나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양귀비라는 영국산 Pointer가 새끼를 여섯 마리나 출산하는 경사가 났다, 꼬물꼬물 정말로 귀엽고 신기 했다. 이 강아지 들을 모두 입양 보내느라 섭섭 하였으나 워낙 집에 개들이 많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엄마 양은 몇 년 후 암에 걸려 먹지를 못했고, 병원에 가서 IV주사를 맞아야만 했다. 이렇게 매일 주사 맞으러 가는 비용이 만만치 않아 약국에서 IV주사약을 Box로 사고, 주사기도 사다가 내가 직접 주사를 놔주었는데 몸이 쇠약 해지니 핏줄이 숨어버려 다리에서 머리까지 옮겨 가며 주사를 놓았지만 결국은 죽고 말았다. 나는 이렇게 그를 보냈다.
이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중 우리 이웃이 조금씩 변해가고 있었다, 우리 Block의 제일 위에는 난장이 약방이라고 침으로 꽤 유명한 한약방이 있었고 우리 바로 윗집은 연탄을 찍고 있었는데 매일 연탄을 찍을 때면 Engine돌아가는 소리와 Fly Wheel과 기계가 의 소음과 진동이 커서 우리 집도 울리는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윗집은 이사를 가 앓는 이가 빠지는 기분이었고 아랫집은 갑자기 2층 양옥으로 바뀌었고 윗집 연탄집은 간데없고 3층 집이 들어 앉았다, 이렇게 우리 주위는 모두 양옥집으로 바뀌어 갔고 우리 집만 납작한 일본집이 되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복덕방에서 우리집을 팔지 않겠 느냐며 어떤 사람을 데리고 왔는데, 부모님은 집을 팔 생각이 없어 거절했으나 끈질기게 사정을 해 안 팔 요량으로 3백이면 팔겠다고 하셨다. (아마 이집을 70만에 샀고 현 시가는 대략 100여만원 대였다). 그랬더니 다음날 현찰로 3백을 가지고와 계약을 성사하고 우리는 3개월내에 집을 비워줘야 했다. 엄마는 부리 낳게 땅을 보러 다니셨고 마침 정릉 종점에 새 양옥 촌이 들어서는 곳에 100평 남짓한 땅을 구입해 그곳에 우리도 2층 양옥집을 짖기로 하고, 마침 아버님이 잘 아시는 한양대학교 건축대학교수님이 작품으로 내놓은 2층집 설계도를 주시어, 한양대에 일하시는 도 목수와 함께 나는 그곳에 Tent를 치고 자면서 2개월 남짓 걸려 집을 짖고 이사를 했다. 이때가 내가 대학을 입학한 해였다.
이시기가 서울이 너무 좁아 확장을 해야 했고, 새 서울을 한강 남쪽으로 넓히려는 움직임이 있었고, 지금의 압구정동, 말죽거리가 새로운 서울이 되리라는 소문이 나며 그곳의 땅값이 슬슬 오르기 시작 했는데, 마침 엄마와 사범학교 같이 다니던 키다리 친구의 남편이 이 도시 계획을 담당하는 책임자였고, 그 친구는 벌써 이 말죽거리에 많은 땅을 사고 팔고 하고 있었으며, 엄마에게 같이 투자할 기회를 주어, 마침 우리집을 짖고 남은 30만원으로 엄마도 한 귀퉁이에 투자를 했는데 몇 번을 탈 바뀜 하더니, 우리 월급쟁이 들은 들어보지도, 만져 보지도 못할 많은 재산이 되었다. 그 친구는 강남에 Building까지 짖는 어마어마한 부자가 되었고, 그 친구 덕분에 우리 부모님도 부를 조금은 모아 노후 걱정은 없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입학해 사회의 초년병의 시작을 했다, 우선은 대학 1학년 우리반 과대표로 당선되어 과의 행사를 맡았는데 첫 업무는 우리반 아이들을 위해 여대생들과 meeting을 주선하는 일이었는데, 첫 meeting은 숙명여대를 찾아가 그곳 과대표를 만나 여학생들과 meeting을 추진 했는데, 우리가 장소와 비용을 대고 그들은 그냥 참석만 하면 되는 조건으로 시작해, 이화여대, 우리 학교 앞 교대 까지 meeting을 했다. 한번 주선 하고 나면 나에게는 구두 한 켤레 값은 남는 장사라 2학년 때 까지 여러 번의 meeting을 추진 했었다. 그러던 중 1학년 초기에 Buffalo Club선배님들이 우리 반에 찾아와 자기네 Club을 소개하며 각 학년 마다 우수한 학생들이 Club에 member 들인데, 앞으로 사회에 나가면 인과관계가 중요 하고, 같은 분야의 선후배가 서로 이끌어 주고 각자 회사에서 일어나는 소식들을 공유하며, 서로 의지를 한다면 사회생활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란 다. 같은 학년 동료들은 서로 친분을 갖기 쉽지만, 선후배, 교수님들, 유명 인사 들과의 만남은 어렵다. 하지만 Buffalo Club을 통해 우리는 할 수 있고, 좋은 기회를 주는 모임이라 친구들을 모아 함께 join했고, 우리들은 활발하게 선배들을 따르며 모임도 같고 선배들도 찾아 다니며 밥도, 술도 얻어먹으며 인과 관계를 쌓아갔다. 이때 선배님 한 분이 나에게 대학생활을 어떻게 보내야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는지 조언을 해 주셨는데 적어도 3가지를 이루어야 하는데, 첫째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성적을 이루어야 하고, 둘째는 인과 관계를 잘 맺어 동기, 선후배와 교수 님들과의 관계를 잘 맺어 도움도 받고, 줄 수 있는 관계를 쌓아야 하며, 끝으로 멎진 연애를 해서 후회 없는 청춘의 기억을 간직해야 한다. 지금이 오직 기회이고 사회 생활하다 보면 여자 꽁무니 따라다닐 시간도 없고 기회도 없다는 것이다.
나는 이세가지를 이루어 봐야겠다 고 다짐을 하고, 수업시간을 열심히 빠지지 않고 다녔고, 시험공부도 친구들과 함께 밤도 새고 노력했으며, Buffalo Club도 회장직을 맡아 제법 열심히 따라다녔고, 많은 선배 후배들을 알아 찾아다니고, 사귀었으며, 교수님도 만나고 알아 갔다. 그런데 연애는 상대가 있어야 하고 금전적인 바침도 있어야 해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리고 과 친구8명들과 이대 여대생 8명이 함께 하는 Serbia Club을 만들고 meeting을 몇 번 가졌다. 마침 Buffalo Club 연말 Party에 Partner를 데려와야 하는데 우리도 또한 선배들의 Partner까지 주선을 하느라 11월 11일 덕수제과에서 Serbia Club이대 생들의 도움을 청해서 만났는데 그날 나의 Partner가 되어줄 지금의 나의 처를 처음 만나, Date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6년간 사귀다가 결혼까지 하게 되어 대학 생활 중 이 세가지를 모두 이룬 셈이다.
대한민국 젊은 사람은 군의무가 있고 정상적인 남자는 18세 이상이 되면 군대를 가야만 한다. 나는 대학생이라 두가지 Choice가 있었는데 졸업 후 혹은 재학당시 3년간 군의 졸병으로 갈 것인가, 아니면 ROTC장교 훈련을 3-4학년 학창 시절에 받고 졸업 후 장교로 2년 반의 근무를 할 것 인가였다. 나는 ROTC로 장교 생활을 하기로 정하고 3-4학년이면 일주일에 3일간씩 군사 훈련을 받았고, 여름 방학이면 한달간 씩 병영 훈련을 받고 1970년 졸업 후 병기 장교로 임관해 부평에서, 영등포에서 근무하다 1972년 6월30일 제대를 했다. 나는 공부하느라, 군사 훈련 받느라, Buffalo Club 다니느라, 연애 하느라 정말로 바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집사람은 내가 군에 있는 동안 유학을 결정해 우리는 약혼식을 양가의 축복아래 치르고, 1971년 Canada로 유학을 떠났고, 나도 군 근무 동안 Canada유학을 위해 서류도 준비하고, 영어 공부도 하며 제대를 해야 여권이 발급되니 그날 만을 기다리며 Canada에 있는 약혼녀와 매주 편지 보내고, 받는 시간 속에 1년이 여삼추가 되였었다.
나는 드디어 1972년 6월 30일날 제대를 했고, Canada에서는 Visa까지 받아 놓았는데 Visa 만기일이 7월 19일이라 별로 시간이 없었다. 여권도 발급받아야 하고, 비행기 표도 매매해야 했다. 군의 제대를 증빙서류로 제출해야 여권의 모든 서류가 갖추어 지면 여권 발급할 수 있는 서류가 나오고, 그 서류를 제출하면 여권이 근무일 10일 이내에 나오는데 그 기간은 2주이다. 여권이 나와야 비행기 표를 구입할 수 있는데 마침 7월 18일 비행기 편은 있단 다. 빠듯하지만 Visa 만기일 전에 Canada에 도착할 수는 있다. 문제는 군의 행정 처리가 빠르게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 세상 사람이 모두 ROTC 8기 제대날이 6월 30일인 것은 알지만, 내근무처에서 내가 제대했다는 서류도 육본에 아직 보내지 않았고, 육본에서 서류를 받았다고 곧바로 병무청에 서류를 보내 내가 제대했다는 통보가 가지 않는다. 이 절차가 아마 빠르면 3개월 정도 걸리고, 이 병무청 서류가 우리 사는 구청에 도착 하면 그곳에서 서류를 띠어 동사무서에 가서 동내 예비군에 등록이 되어야 동사무소에서 내가 제대하고 예비군이 되었다는 서류를 구청에 제출하면 그 서류를 병무청에 접수해 내가 제대 했다는 증빙 서류가 만들어 지는데, 정부에서 이 같은 서류는 별로 바쁘지 않아 또 한 2-3개월이 걸리게 되어 6개월 정도 되어야 내가 외무부에 제대 증빙서류를 제출할 수가 있는 판이라 여권을 비행기 날짜 이전에 (7월18일 이전) 받는 것은 불가능 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만 약 다시 Visa신청하면 1년이상 걸리고 Canada 가는 시간은 1년이상 지체가 되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군복으로 갈아 입고 택시를 타고 내근무지로 가서 서류를 빼앗아 육본으로 향했고 그곳의 담당자를 만나 나의 사정이야기를 하고 사정 사정하여 육본에서 병무청으로 보내는 서류를 받아 병무청에 제출 했는데 사실 이 서류 들은 민간인이 가지고 다닐 수도 없고 Seal이 되었 있는 서류이며 민간인이 접수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마침 시청에 근무하는 막내 삼촌의 인맥을 통해 병무청의 우두머리에게 전화를 넣어 서류 접수에 성공을 했다, 그곳에서 서류를 받아 동내 구청으로 접수를 마쳤는데 이 모든 일을 이틀만에 처리했고, 다음날 동사무소에 가서 예비군 신청을 해 예비군 편성을 받았는데 제대하자마자 예비군 신청 한사람은 내가 최초라고 한다. 이서류를 가지고 구청에서 병무청에 제출하는 서류를 만들어 그곳에 가서 제대했다는 증빙 서류를 만들었다, 이서류는 삼촌 덕분에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었고, 외무부에 가서 서류 접수를 해 이제는 여권 발급서류 만 나오면 된다. 그런데 나보다 앞서 제출한 서류 들이 가득 있어 내 서류는 언제 나올지 모른 단다. 오늘 나와도 여권발급 하는데 2주가 걸려 제시간에 표를 구입할지 모르는데 정말로 큰 산에 부딪쳤다, 내 사정이야기를 하고 졸라 보았지만 그들의 대답은 한결 같았다. 이제 겨우 2주전으로 좁혀 놨는데, 한참을 멍하니 그 자리에 앉아 생각하니 아찔하다 거의 다 왔는데. 그런데 문득 큰 고모부가 떠올랐으며, 그 당시 법무부 차관을 하고 계셨었는데 그분께 사정부탁을 해보면 어떨까 생각이 들었다. 그분 사무실을 찾았는데, 마침 같은 정부 청사 여서 쉽게 찾았다. 비서 아가씨가 차관님을 예약도 없이 찾아왔다며 핀잔을 주었지만 나는 사정이 사정인 만큼 내 고모부이니 꼭 만나 뵙겠다고 고집을 부려, 드디어 고모부를 만났고 사정이야기를 하니 김 검사라는 사람을 불러 나를 도와주라고 했다, 그분이 나에게 편지 두 장을 써서 주었는데, 하나는 외무부 또 하나는 여권 발급하는 부서 였다. 다음날 그 편지를 들고 외무부 담당자에게 보여주니 얼마 있다가 여권 제출 서류가 나왔고, 그것을 들고 중앙청에 있는 여권과에 편지와 함께 서류를 제출하니 2시간 만에 여권이 나왔다. 6개월이상이 걸릴 모든 서류를 4일 만에 해결하고 비행기 표를 구입 했다. 지금 생각해도 기적적이고, 아찔하고 숨가쁜 시간들이었다. 이렇게 파란만장 끝에 나는 Canada에 도착했고 집사람과 1년반만에 상봉을 했다.
이렇게 Canada 생활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Kirk목사님의 주례로 정식으로 Canada에서 결혼을 해 Marriage Certificate를 받고 또한 이민까지 되어 그곳에서 Support하는 English as a second language course를 지원금 까지 받아가며 다녔고 6개월 정도 되니 귀도 뚤리고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도 제법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동안 이민국에서 직업 알선을 해 Gas Station에서 일을 했다. 그곳 Manager의 추천으로 Truck을 정비하는 Hop’s Wood정비소에서 Apprentice으로 일 하게 되어 기술도 배우고 돈도 벌고 했었다, 그러나 다음해 9월에는 대학원에 입학해야 하는데 지난해에 나를 Master Student로 받아줄 Professor Tarasuk 씨를 만났었는데 내 영어 능력이 조금 불안한 모습이었으나, 이제는 6개월간의 영어연수도 마치고 어느정도 사회생활도 하고해서 용기를 내 지도교수를 다시 만나니 이제는 영어 시험 ( Michigan or Toffler test)을 치루어 85점이상 합격하면 등록하라고 했다. 영어 시험은 무사히 치렀고 합격했으며 등록을 해 1973년 9월1일 대학원 공부를 시작했는데, 마침 이날 우리 첫째 아들도 태어났다. 이렇게 Western University에 학창 시절이 시작되었고 우리는 학교교정 내에 있는 Married Student Apart에서 생활을 했으며, 밤샘도 하고 열심히 공부해 1975년에 졸업을 했다. Dr. Tarasuk 지도 교수는 우리의 생활비를 걱정해 기본 장학금 , Teaching assistance, 및 1년에 한번씩 특별 장학금을 신청해 주어 넉넉한 생활을 하고 졸업당시 몇 천불의 저축까지 있었다. 졸업시기가 가까워 오니 취직을 해야 하는 걱정이 앞선다. 가끔씩 이삿짐 Center의 Trailer가 들어와 이사 가는 것을 보면 부럽기 그지없다. 그는 어디로 취직되어 이사를 가는 것이다. 나도 졸업하기전 10월부터 많은 Interview를 했지만 별 소식없이 3월이 되어 오니 이제 대학원 졸업이 3개월 밖에 남지 안았는데 만약 그때까지 취직이 안되면 PHD Course를 Supervisor 교수와 상의를 해 앞으로 먹고 살 방도를 해야 하는데, 만약 박사학위를 하면 취직문은 좁아 연구소나, 학교에 남아야 하는데 나는 교수를 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마침 Chatham에 있는 Canadian Fram이라는 회사에서 Interview 소식이 있어, 요번에는 어떻게 하던 그들에게 관심을 사기위해 그 회사에 대해 연구했고, 현재 연구하는 일, 그들의 조직과 지침들을 연구해 Interview날 그들이 자기회사 소개 전에 그들의 회사에 대해 미리 아는 척을 했고, 그들의 연구 과제등에 관심을 보였더니 4월에 2nd Interview를 하라고 통보가 왔다, 그날은 눈이 너무 많이 와서 401 HWY가 막혀 그 회사에서 우리집에 전화해 연기를 하려 했으나, 나는 눈이 많이 와 미리 출발한 후였고, 그 당시는 Cell Phone 도 없어 연락할 길도 없었다. High Way에는 아무도 없었고 나만 열심히 달려 그곳에 도착했는데 모두 놀라는 눈치였다. 이렇게 2차면접을 Manager와 V.P.와 함께 식사를 하며 화기애애하게 끝냈고, 다음달 5월20일 부터 출근 하라는 통보가 왔다. 우리도 이삿짐 Center에서온 Trailer에 이사짐을 싣고 Chatham의 Baldoon Apt.로 이사를 했다. 이렇게 직장 생활이 시작 되였고 직장상사의 허락으로 대학원 논문도 무사히 맞히고 졸업장도 무사히 받았다. 나는 첫 직장인만큼 열심히 노력했고 인정받아 실력 있는 Engineer가 되었다. 그 이듬해에 엄마가 손자도 볼 겸 또 내가 어떻게 사나 궁금하셔서 Canada를 방문하셨다. 마침 내가 회사에서 연구하던 Fan Clutch를 시험하기 위해 Death Valley를 가야 하는데 어머님을 모시고 북미 여행을 함께하며 시험도 하고 엄마 미국 캐나다 여행도 시켜 드릴 겸 회사의 허락을 받았고 Ford Country Square wagon으로 실험 장비를 장착하고 엄마, Ted, wife이렇게 4명이 Chatham을 출발했다. 첫 목적지는 Florida에 사는 사촌 여동생 후열이 집으로 정하고, 이틀 만에 도착해, 그 집에서 머물며 Disney world구경도 하고 Hot test도 하고 지내다가, 엄마가 조와 하시는 Grape fruit, Orange를 큰 자루( 50개)로 하나씩 사서는 싣고는 다시 Texas의 끝없는 HYW를 달렸다. 그리고 New Mexico에들려 Mexican food 식사도 하고 Phenix를 거쳐 Grand Canyon에 도착해, 장관을 구경 시켜드리고는 우리의 Test 목적지인Death Valley에도착해 Cooling test를 하느라 언덕을 오르락 내리락 했다. 그리고는 Las Vegas를 거쳐 LA에 안문옥이라는 친구의 집을 방문했는데, 이 친구는 나의 중고등 학교 동기이며, 그 친구 어머니는 우리 엄마 사범학교 선배여서 반갑게 만났다, 그곳에는 또 wife동창들이 많이 살고 있어 오랬 만에 동창회 하는 기분이었다. 그들은 이곳에 이민을 와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었다. 우리는 LA에서 3일간 묵고는 San Francisco에 들려 유명하다는 China Town에서 식사를 했다. 우리는 계속 달렸는데, 멀고도 먼 Redwood 숲의 향기를 맡으며 2틀간 계속 운전했고, 그 숲을 빠져나왔는데 나무 높이가 300m이상 되었고 아름드리가 얼마나 큰지 자동차가 통과하도록 만든 곳도 있었다. 드디어 Seattle에 도착했고, 우리의 다음 목적지는 Canada Vancouver에 사는 친구를 방문하는 것이어서 계속 운전해 Boader를 통과, 목적지에 도착했다. 정경배라는 친구였는데 London 살 때 같은 교회를 다니며 탁구도 치고, 했는데 못하는 운동이 없었다. London에서 처녀 랑 눈이 맞았는데 집안에서 반대를 해서 Vancouver로 VW를 타고 탈출한 재미있는 친구다. ,오랬 만에 만남이 반가웠고 Trading을 하며 잘 살고 있었다. 우리는 간단히 밴쿠버 구경을 하고 Rocky산맥을 넘어 세계에서 유명한 Rocky 관광지 Banff라는 곳에 도착했고, 온천 목욕도 하고 Cable car를 타고 올라가 웅대하며 끝없는 Rocky 봉우리들을 보았다. 그리고 거리에는 Moose들이 나타나 자연의 나라 캐나다를 실감케 하였다. 이렇게 우리가 만든 여행 Bucket List를 마치고, 이제 집으로 돌아가는 길만 남았는데 Canada 1번국도를 타고 Alberta주, Saskatchewan 주, Manitoba주를 거쳐 3일이상 평평하고 변화가 별로 없는 지루한 Drive를 했고, 드디어 Ontario주 5대호중 가장 커다란 Lake Superior에 도착 했다, Thunder Bay, Sault Ste Marie를 통과하고 Manitoulin Island에 도착해서 Ferry를 타고, Tobermory에 도착했다. 이제 Lake Huron을 끼고 21번 도로로 가다가 London에서 401HW를 타고 2시간 만에 Chatham으로 돌아왔는데, 자동차 milage를 보니, 이 모든 여정은 10,000 mile (16,000 Km)였고 3주 만에 돌아왔는데, 이곳저곳 1주일 머물었던 날들을 빼면 2주간의 Drive였고 매일 평균 715 mile(1,143Km)을 운전 했었다. 일생일대의 Drive였고 어마어마한 여행이며 기록이었다. 덕분에 엄청난 양의 Cooling data도 모여, 회사의 연구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엄마는 한국에 돌아가 3주만에 그 넓은 미국과 Canada를 구경 했다고 자랑거리가 되었다.
나는 이 회사에서는 처음에는 Cooling Division의 R&D Department에서 일을 하였 는데 그곳에서 새로운 Product들을 개발해 특허를 많이 발원했고, 일년에 한번씩 특허 발원 시상식이 있었는데, 회사전체의 다른 Division ( Control’s, Induction ) 사람들과 함께 상을 탔었는데 매년John Cook라는 Engineer 다음으로 많은 Pattern을 소지해 유명세를 타고 있었다. 그리고 우리 R&D는 처음 Lath한대, 실험 기사, Engineer, sale 4명으로 시작해 이제는 영업, 생산, 실험실, Sample 작업실,등 모두10여명이 넘게 되었고 Engineering Department에도 새로 Manager가 타사에서 발탁되는 등 점점 커져가는데 나는 연구생 Engineer로 인식이되, 진급에는 열외였다, 이곳에서는 진급하기는 글렀구나 생각하던 이때 마침 Controls’ Division에서 Engineer를 모집했고 Apply했더니 그곳 manager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맞이해, 그곳으로 옮겼고 그곳 에서도 계속해서 새로운 Product를 개발하고 두각을 나타냈고 결국 Supervisor로 진급했다. 그 당시는 회사 합병이 유행하기 시작했고, 우리 회사는 Bendix회사에 합병되었고, Bendix는 Allied사에 그리고 Signal이라는 회사와 합쳐 Allied Signal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은 Globalization이라는 붐을 일으켜 온 세계가 사업 무대가 되어 누가 먼저 세계를 정복하여 America, Europe, Asia을 진출하며 모두가 한울타리에 있었다. 이때 Allied Signal도 예외는 아니었고 한국에 새로 진출 하기 위해 이윤근 사장님을 Hire하여 진출할 준비 중이었다, 이때 나도 이왕이면 넓은 세상으로 진출해, 그리고 조국이 아닌가 싶어 꿈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 이윤근 사장님으로부터 Love call이 와서 함께 가방 하나씩 들고 1987년2월 Korea로 출발했고, 신라호텔에서 6개월간 있으며, 대성산업과 50/50 Join Venture를 만들었다. 우리 첫 사무실은 이화 Building에서 열었고, 새로 사무 기기 구매와 사원들을 모으며, 대우, 기아, 현대 자동차에 방문하며 Sale에 나섰고, sale Product는 연료분사장치 였는데 아직도 그때 까지만 해도 세계의 모든 자동차가 Carburetor로 연료를 공급하고 있었고 자동차의 Emission 규제가 까다로워 지면서 점차 Injector로 분사하는 자동분사 장치로 바뀌어 가고 있었다. 한국에서는 고급 승용차인 대우의 Super Salon과 현대의 Grandeur만 이장치가 적용됐는데 Volume은 1-2천대로 매우 적었으나 앞으로 모든 차량이 바뀌어 갈 것을 예측하며 국산화를 해야 한다는 Vision을 가지고 있었고, 일단 Hardware를 수입해 영업을 하다가 공장을 짖고 직접 생산하자는 계획이었다. 그러나 이 연료분사 장치는 나 에게도 생소 할 만큼 새로운 기술이었다. 그리고 그때 우리 연료분사 System을 담당하는 Division이 Siemens Automotive라는 회사로 팔려 나가 하루 아침에 우리는 본사가 미국에서 독일 회사로 바뀌었고 이 연료 분사 장치는 꾀나 복잡한 System이었고 Hardware도 수십개가 연결되어 있다, 나도 본사 미국, 불란서, 독일등을 다니며 공부를 해야만 했고 속성 Orientation을 마치고 한국에서는 유일무이 한 연료분사 장치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나 필요 할 때는 언제든지 본사에서 기술자들을 지원받아 Presentation도 하고 Sample등을 공급받았다. 이제 점차로 계약도 따고, 진행이 되어 Engineer들도 고용해서 그들도 또한 본사로 훈련을 보내야 했고, 또한 Warehouse, 공장건물, 사무실, QC 실험실 등을 마련 하는 것이 급선무 였다, 계약된 자동차들은 본사로 보내져 Fuel system Calibration을 했는데, 우리 기술자들도 파견 하고는 했는데 배우는데 한계가 있었고, Calibration 할 수 있는 Engine Dyno, Chassis Dyno, 배기 가스 analizer없이는 시간낭비요, 미래를 위해서는 우리도 이 실험을 위한 Emission Lab이 꼭 필요해 보였다. 그러나 이장비들과 건물을 위해서는 5백만불 이상의 투자가 필요하고 많은 Engineer 들과 Training time을 요구했다. 이 투자 없이는 우리의 미래가 없다는 결론을 얻고 사장님을 설득했고, Partner인 대성 산업을 설득했으나. 투자비가 워낙 많이 들고 현 투자 계획에는 한 푼도 사용할 수가 없었다. 증자를 해 더 투자를 해야 하는데 현재까지 들어 간 돈도 64억이라는 돈이 들어 갔고 아직도 들어갈 돈이 많아 보이니 대성산업에서는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기분으로 매우 부정적이었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날 시작한 대성 정기는 현대 자동차, 미꾸니, 대성 이렇게 셋이 투자해 첫날부터 sale은 현대 자동차, 물량도 현대 Volume이고, 투자금도 적고 현재 일본 수입 대체품이라 그냥 처음부터 이익이 나는 장사였으니, 그와 비교해 보면 우리회사는 Risk가 많아 보였다. 그래서 우리는 64억을 더 증좌를 했고 그들은 빠졌다, 대성지분은50%에서 25%로 되었고. 우리는 결국 연구소를 만들었고, sale이 점차 늘어나고, 이익을 내는데 몇 년이 걸렸지만 이제는 돈을 너무 많이 벌어 숨기느라 야단이다. 대성은 이제야 알아차리고 지분을 다시 얻고자 했으나 그 돈으로는 지분을 조금밖에 얻을 수가 없어 아쉬워하고 있다. 이렇게 나는 한국 Assignment를 마치고 Chatham에 Manager로 복귀했고, 새 Product 개발 업무를 하고 있었다. 이제 북미 시장은 일본 자동차 회사가 조금씩 잠식하고 있었고 우리도 시장을 넓히기 위해서는 부득이 일본회사의 Trans plant에 납품을 해야만 했다. 그때 우리 Division Head는 Lou Candosso였는데 내Mission은 어떻게 든 일본 시장을 뚫어라 였다. 나는 1992년 Larry Keenan이라는 Sales 친구와 일본으로 건너 가서 일본 자동차 회사 들에게 우리 제품들을 소개하고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Honda R&D에서 Electrical EGR valve Sample 요청이 와서 그 sample로 Honda와 연결이 되었다. Nissan 에는 EGR Nematic control valve sample이 들어 가는 등 성공적인 시작이 있었고, 매해 여러 번씩 일본을 부리나케 다녔고 Honda Engineer Team들도 Canada를 다녀 가는 등, 열심히 노력 한 끝에 드디어 3년후인 1995년 첫 발주와 동시에 일본으로 가서 본격적인 Support를 해야 했는데, 그곳으로 보낼 마땅한 Engineer가 없었다. 내가 직접 일본으로 이주해, 밤에는 본사와 낮에는 일본 연구소를 오가며 거의 하루 24시간 일을 했다. 덕분에 발주를 매해 3000개에서 3만, 40만 80만 120만으로 늘려 나갔다. 이렇게 나는 일본에서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는데, Chatham에 있던 보스 Luo Candosso는 타회사로 옮겨 갔고, 새로운 management가 왔는데 일본에 있는 우리 사무실의 경비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나는1999년 1월에 Engineering Director로 진급 시키며Chatham사무실로 복귀 시켰다. 얼마 후 Allied Signal시절 옛 동료였던 Jim Arnold씨가 Windsor에서 잠깐 만나자는 전화가 와서 만나보니, 나에게 자기네 회사(Tower Automotive)로 오라는 Scout 제안을 해왔다. Tower Automotive는 지금 막 승승 장구 하는 회사로 M&A를 해 $ 400 million 회사가 $ 800million 회사도 합병하고 $3 billion회사로 커졌고, 유럽, 일본, 중국, 한국으로 진출해 명실공히 Global 회사를 만들며, 한국에서 서진 산업을 인수 중인데 그곳에 가서 그 회사를 운영할 CEO를 찾고 있단 다. Salary는 미국 $로 지불하며 현재 Salary에 25%증가 시켜주고, Bonus는 실적에 따라 100%까지도 줄 수 있고, Expatriate package와 Tower Automotive VP Executive benefit + Retirement Package는 현 Siemens를 계승하는 대우로 맞추어 주겠다는 파격적인 제안을 해 왔다. 이 Tower Automotive 회장은 내가 Cooling Div, 에서 Controls Div.로 갈 때 나를 뽑아준 그 당시 Director였고, 나를 Engineer에서 진급 시켜 Supervisor로만들어 주었던 Dugal Cambel이 였는데, 나를 추천 해 Jim에게 만나보라고 했다. 대우가 파격적이고 또한 이제 나도 나이도 있어 Senior Management Position에 어울리며 새로운 도전에 끌렸다. 그래서 Siemens에게 이직을 알리고 떠나려는 나에게 뒤늦게, Siemens의 회장이 나를 만나자고 했고, 한국의 Siemens President로 보낼 테니 마음을 접으라는 것이었다. 갑자기 이런 Proposal들이 나에게 찾아왔으나 나는 Tower Automotive로 이직을 결정했다.
2000년 1월 나는 한국으로 갔고, 서진 산업으로 출근해 3,500억 sale의 회사 2000명의 직원이 있는 이 회사의 President로 3년간 근무를 했다. 또한 그동안에 한양대학 기계과 후배들을 위해10여년간 정부가 대학생 모임을 중단시키어 멈추어 있던 Buffalo Club을 재생 시키고자Old Member들을 연락했는데 12 기까지 80여명이 모일 수 있었으며 함께 Buffalo Club을 재 출범시켰다. 그리고는 마침 기계과 과장이 동기여서 그의 도움으로 “젊은이들의 사회 새 출발”이라는 Semina를 열고 재학생들을 모으기 위해 음료수와 Hamberger를 무료로 제공하여, 성공적인 100여명의 모임을 가졌고 재학생 10여명의 Buffalo Club 회원을 모집하여, 향후 5년간 재학생들을 36기부터 44기까지 200여명의 Buffalo후배들을 만들고, 키웠다. 대학에서는 산업안전 과목을 맡아 가르치며, 인성 교육에 힘썼으며, 그들의 미래의 꿈과 인간 됨됨이에 대해 강의 시간을 할애하였다. 이렇게 젊은 세대와 함께하며 뿌듯한 시간들을 보냈다. 또한 나는 서울대 산업 대학원에서 최고경영자를 위한 경영대학을 이수해 많은 인맥을 쌓아갔다. 그런데 Tower Automotive가 점점 어려움을 겪으며, 우리 회사의 투자를 간섭하기 시작하여, 한참 자리를 잡아 발전하고 있는 서진산업의 발목을 잡았다. 우리의 5개년 계획은 거의 2배 이상으로 성장하도록 계획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정도 투자를 계속 해야 하는데 Tower Automotive의 연결 재무 재표상 자본금 비율 대 차입금 비율을 맞추기 위해 우리가 투자하는 차입금이 너무 많아 Approve해 줄 수 없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본사에 찾아가, 지금이 우리 회사 성장의 critical point이고 한국에 있는 은행에 차입에는 아무 문제가 없고, Customer들에게 새로운 발주들을 받은 상태라, 만약 우리가 주춤하면 은행도, Customer도 이상한 눈으로 볼 것이며, 이 기회를 놓치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설득을 했으나, Tower Sr. management는 자신들의 회사 전체가 지금 현재 살아남아야 하는 Survival mode로 우리의 미래는 그들에게 별로 중요 하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서진 산업의 dilemma를 안고 계속 운영 한다는 것이 용납이 되지 않아 사표를 냈고, 서진 산업 36%의 지분을 가지고 있는 Partner인 배석두 회장도 Tower에게 투자를 허락하던지 지분을 모두 인수하던지 선택 하라는 강수를 두고 돌아왔다. 결국 그들은 나머지 지분을 인수했고 새 President가 왔다. 5년후 Tower Automotive는 Bankruptcy file을 했고, 이 서진 산업은 다시 몇 년 후 헐값으로 배석두 회장이 다시 인수했다. 나는 2년간 SECO 연구소를 만들어 M&A및 새로운 사업 (waste management, water정화 system, Senior community, Magnesium hot forming die development)들을 추진 했는데 배석두 회장은 현재 Clutch Div. Cam Div. Wheel cover & Steering wheel Div. 을 운영하고 있었고, Door 와 Plastic molding 회사를 인수하는 중이라, 당분간 우리 연구소에 투자할 여력이 별로 없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계속 그곳에 있을 의미가 없어졌다. 2년 동안 연구하던 연구소장 직을 이직하고 2005년 5월 Canada로 돌아왔다.
그동안 정말로 바쁘게 살아왔다. 첫 아들은 1999녀 9월에 결혼시키고 2004년 4월에 첫 손주를 얻었다. 내가 Canada에 돌아온 주 이유는 둘째, 셋째 아이들이 아직 미혼이며 누군가 옆에서 같이 있어야 할 때라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London도시로 정착했는데 이곳에는 Wife의 언니 둘, 그리고 오빠가 살고 있고, 큰아들은 Mississauga, 막내딸은 Toronto, 둘째아들은 Michigan Farmington Hill에 살고 있어 아이들 사는 곳의 중간 지점이고 이곳은 또한 내가 처음 Canada에 첫발을 딛고 학교를 다니던 곳이라 지리도 익숙하고 처음 시작했던 곳이라 마치 고향 같고, 정이 많이 든 곳이며, 인구도 30만명으로 Canada에서는 작지 않은 도시이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우리의 Retirement life(정년)가 시작되었다. 우리는 여행도 여기 저기 다니고 바쁘게 지내 노라면, 개인 집을 가지는 것 보다는, 밖에 잔디관리와 눈치우는 일을 하지 않아도 되는 곳이 좋겠다고 해서 Condo를 사가지고 이사해 왔는데, 한 4-5개월 지내보니 답답하고 좁아, 뒷마당에 숲도 있고 아이들이 놀러 오면 같이 하는 약간의 공간도 있는 집이 더 나을 것 같아, Dorchester에 뒷마당에 Walk out있는 2층 집으로 다시 이사를 했다. 그리고는1년 남짓 우리는 여행도 하고, Golf (Par game, Under par) 도 치고 바쁘게 지내 던 중 2007년 2월 어느 날 예전에 Siemens에서 일본도 같이 다니며, 십 여년 Sale를 같이 했던 Larry Keenan이 찾아 왔다. 자기가 돌보고 있는 회사인데, 지금 한국 Project를 시주해 진행 중인데 전혀 진전이 없고 Communication이 마비 비상사태라 내가 좀 도와주어야 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Larry와 함께 Barrie에 있는 Prodomax (예전 Siemens에 있을 때 생산 장비를 납품하던 업체)를 찾아가 사정이야기를 들으니 7월말까지는 Assy 장비가 Mexico로 도착해 Robot Calibration을 해야만 생산하는 Timing을 맞춘 단다, 발주는 작년에 받았는데 아직도 무엇을 생산해야 하고, 생산 장비 설계는 시작도 못한 상태로 이제 4개월 남짓 남아 정말로 수습 불가 상태였다. 알고 보니 Mexico에서 차체조립 장비수주를 받았는데 GM 자동차 회사가 한국에 있는 대우 자동차 assembly line을 Copy해 Mexico에서 생산하는 계획으로 Mexico 생산장비 회사가 수주해 일부를 Prodomax에게 주었는데, Mexico 회사와 연락해서 한국에 설계도면 요청하면 1개월 이상이 지나도 연락이 없고, 또 연락 하고 어영부영하다 1년이 지나가 버렸단다. 이제는 Prodomax도 별 방법이 없어 나를 찾았다. 나는 그들과 6개월 계약을 했고, 마침 Dawoo 자동차 사장이 ROTC 동기이며, 경복 후배라 그에게 부탁해 자동차 Assembly 공장 책임자를 소개 받았고, 그의 도움으로 Drawing도 구하고 부품 ASSAY Line도 방문하고, 생산 Line도 방문해 생산 방법도 알아 보고, 서진 산업에서 생산 line을 납품하던 업체 들 중 둘을 만나 그들에게 ASSY Hardware를 하청을 주어 Line Fixture를 설계 제작하도록 하며, Prodomax가 Mexico에서 Robot를 투입해 Final Assy Line을 만드는 것으로 정리하고, 매일 밤을 새다시피 follow up meeting, 설계검토, Fixture제작 검토, Prodomax Robot의 운전 및 진입 각coordination등의, 정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보내며 6월말에 Fixture들을 제작 시운전 완료 하여 Container에 실어서 7월 1일 Mexico로 보냈다. 아마 7월 말이면 도착해 예정 시간에 도착할 수 있게 되었다. 얼마만에 맛보는 긴장감과 thrill이었나! 생각해 보면 바쁘긴 했어도 살아 있는 느낌이었고 보람이 있었다. Retire해 느긋한 시간을 지내던 나에게는 옛 잠을 깨우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렇게 무사히 Assignment를 마치고 한국에서 쉬고 있는데, 이찬영 씨가 전화를 해 만나자고 했다. 일본에서Wife와 같이 일본어 공부를 같이 했던 친구의 남편인데, 함께 일본에서 몇 번 golf를 쳤던 적이 있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가 지금 창신산업에 사장으로 있는데 북미로 진출해 공장을 짖고 싶은데, 장소와 사람을 찾는다고 했다. 강남에 있는 창신 산업에 가서 회장님을 만나 뵈웠다. 전창일 씨였는데 참신하고 진실해 보였으며, 마침 사대부국 국민학교를 졸업하셔 7년 동창 선배님이 시었다. 북미는 처음 진출이고, 그곳 사정도 잘 모르고 Canada의 규제와 Culture를, 그리고 특히 북미 자동차 회사의 성질도 모르는 터라 많은 도움이 필요 하시다고 했고, 나도 마침 Prodomax일로 약간 신선한 충격 속에 있던 터라 새로운 도전이 매력이 있어 보였고, 함께 추진해 보기로 하고 Canada에서 곧 만나 미래 Plan을 세우기로 하고 헤어졌다. 며칠 뒤 전회장님은 staff들을 데리고 Canada로 오셨고, 우리는 2007년7월 10일에 CSAT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공장 건설계획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London시에서는 London Economy Development Corporation이라는 곳에서 적극적으로 도와주었고, 이곳에 빈 공장 시설들, 땅 부지도 보여 주고, 건설업자 등을 소개해 주어, 공장부지 연구 중 Existing 공장들은 우리의 제품 생산 하는데 적합하지 않아 새로 짖기로 하고, 건설회사를 3곳을 소개 받아 건설비용과 Lease Option을 알아보니 6백 5십만불 정도를 요구했고, Lease는 10년이상 해야만 하고 10년후 인수하면 우리에게 드는 총비용은 천 3백만불 거의 두배를 주어야 된다. 처음에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이점은 있으나 비용이 만만치 않아, 은행에서 financing해 직접 짖는 게 어떨까? 했더니 회장님이 우리는 이곳에 알려지지도 않았고, 아무 sale도 없는데, 과연 돈을 빌릴 수 있을까? 걱정하셨다. 그렇다고 이렇게 많은 비용을 들이면 회사 운영에 어려움이 있고, 그렇다고 6백5십만불의 돈도 없고, 현재 계획은 처음 2백 만 불 자본금으로 시작 4백 만불까지 늘리고, 5년내에 이익을 내서 창신산업의 도움없이 독립 하는 계획이었다. 처음부터 어려워 보인다. 그래도 시작도 안해보고 포기할 수가 없어, CSAT의 5개년 사업계획서를 만들어 그것을 들고 LEDC의 도움으로 6개의 은행들을 찾아 다녔다. 그런데 은행들의 반응은 모두 어려워 보였었는데, 마침 HSBC 은행의 책임자 James가 우리를 다시 불러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첫째는 우리가 2백만 불을 먼저 투자해 건물을 짖기 시작하면, 자기들이 2백만불을 빌려주고, 다음 단계를 추진하고, 또다시 투자를 늘려 건물을 우선 완성하고, 사업을 운영해 가는 실적과 장비 Inventory에 따라 다음 Loan을 상의해보자는 것이었다. 두번째는 창신산업이 이 Loan을 100% 갚아 준다는 Guarantee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침 창신산업의 실적은 지난 5년간 계속해서 2백만불 이상 순이익을 낸 건실한 회사였는데, HSBC는 그것을 긍정적으로 보았던 것 같다. 이렇게 우리는 Financing을 받게 되었고 London시에서 공장지대로 새로 개발한 Innovation Industrial Park에 6.5 Arce를 구입했고, LEDC의 소개로 Noah 라는 건축사를 소개받았는데, 아랍계통 사람으로 공장을 많이 지어보고 이력이 상당 했다. 우리는 직접 공장설계를 했고, 공장허가를 받으며, 배수 시설로 시작해 골절과 cement 바닥을 깔고, 한 걸음 씩 시작해 Wall을 올리고, 지붕을 올리며, 드디어 5백 만 불을 들여 완공을 했고,1백 5십 만 불 정도를 절약했다. 이제부터는 일할 사람을 뽑아야 했고, 한국에서 구비를 갖출 Tube를 종류대로 들여와서 진열하고, 생산 설비를 주문하고, 또 한국에서 기술자들이 몰려와 생산 Line을 설치했는데, 전기시공 허가와 환경청, 안전 검사 등 Canada 규정을 모르는 우리에게는 시행 착오가 많아 20% 이상의 설치 비용과 시간이 들고 나서야 끝이 났다. London시장과 LEDC 임원들, London 신문 기자, 몇몇 지인들을 모시고 회사 발족식을 2008년 여름에 가졌다. 이제 기본 구색은 갖추었지만 Customer가 누 군지,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approach해야 할지 막막하고, 회사의 인사부, 회계업무, QC system, Logistic, 기본조직과, 회사의 Vision, Mission Goal등 모든 것을 갖추어야 하는데, 초창기라 인사 회계는 LEDC의 도움으로 Consulting을 쓰기로 했고, QC, Logistic, 공장장, 기술자 등은 Interview해 뽑았고, Training을 위해 한국파견도 하고, 한국에서 몇몇 기술자 들이 Canada로 와서 상주했다. 그러던 어느 날 Steve 라는 사람이 찾아왔는데 자기가 우리를 위해 Sale을 해 주겠 단다. 자기는 Kitchener에 살고 있는데 북미Tube업체도 많이 알고, Mechtron에서 Tube Fabrication, Exhaust tube Punch기계를 만들고 물건을 납품 하는데 그곳에 다리를 놔 주겠 단다. 우리는 잃을 것이 없고, 막상 막막하던 차에 일이 성사되면 Commission을 주는 조건으로 그와 계약을 했고, 우선 적은 양의 납품을 시작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또 미국에 있는 Tube Fabrication 회사 BOSAL을 소개해 주어서 함께 가보았는데 그 회사는 네덜란드 회사로 Volume도 많고 제법 커다란 회사라 공을 많이 드렸고, 드디어 납품을 하게 되었다. Toronto에 있는 Ultrafit이라는 회사는 내가 찾아 시작부터 공을 많이 들였는데 5년만에 드디어Management가 바뀌며 Business가 성사되었고, Mexico 회사 Katcon과 연락이 되어, 새 Business가 시작 되었고, 또한 회장님이 잘 아는 일본철강 회사 NSSC의 도움으로 FIC, FRS, MISA등에 NSSC의 특수 철로 만든 Fuel Tube를 납품하기 시작 했다. 우리는 서서히 가장 좋은 품질에 가격경쟁력을 가지고 있는 회사로 알려 졌으며, 이렇게 우리는 2009 년 $1 million, 2010 $4,5 M, 2011 $8M, 2012 $12M 2013 $16, 2014 $23, 2015 $28, 2016$ 32M, 2017 $45M 로 계속 성장했으며 2015년에 드디어 1/3의 Market Share를 차지 하게 되었고, Cash flow도 Positive를 이루었다. 이후 부터는 매년 이익을 내기 시작했고 자리가 잡혀 갔다. 2017년에는 내나이도70이 되어 은퇴하기로 결심했다. 회장님은 극구 만류했으나 나는 하루라도 젊을 때 은퇴해서 자유의 시간을 갖고 싶었다. 이렇게 나는 내 몸을 CSAT에서 마음껏 불사르고 머리털 도 많이 빠지고 히 끗 히 끗 한 훈장을 달았다.
이렇게 바쁘게 지내는 동안 2006년1월에는 큰아들이 둘째 손자(태현, Davis) 를 2008 년 9월 에는 둘째 아들 결혼을 시켰고, 2009년7월에는 큰아들이 첫 손녀(수현, Nichol)을 선물 했고, 2013년11월 에는 Peter Brough( Scottish 출신)과 막내딸을 결혼시켰고, 2014년에1월에는 둘째 아들이 첫딸 가현(Emma)를 선물 했고, 10월에는만내 딸Abby가 결혼 할 때 약속 했던 “한국에 놀러가 함께 한국을 구경 시켜 주마”를 이루고 함께 했는데 한국음식도 잘 먹고 매우 흡족해 했다. 그리고는 2016년 11월에 막내딸이 첫아들 Beckett(제현)을 낳았고, 2019년에는딸을 낳아 선사했다. 이렇게 3손주, 3손녀를, 며느리 2, 사위 하나, 모두 모이면 우리 부부 합 해 14명이 된다. 얼마나 축복받은 Family인가 아이들 모두 건강하고, 손주들 모두 건강 하니 이에 더 바랄 것이 무엇인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우리 모여 함께 식사할라 치면 정말로 북적거리며 사는 맛이 난다.
이렇게 우리는 태어나 부모님 밑에서 사랑을 받고 자라다가, 사회에서 기대하는 삶에 충실 하다가 연애도 하고 학교도 다니고, 직장에 들어가 독립이라는 것을 하며 자신들의 복음자리를 만들고 그들도 또 자식을 낳고 키우고 돌보다가 그들도 하나씩 둘씩 둥지를 떠나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만들며 또 아들 딸 낳고 늙어 간다. 이렇게 인간의 삶은 돌고 도는 윤회를 하며 살고, 이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고, 국가를 만들며 역사를 만들어 간다. 우리는 이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하다가 때가 되면 흙으로 돌아간다. 젊었을 때는 이 여정이 길어 보여, 꿈도 꾸며 열심히 노력하였는데, 우리같이 70이 훌쩍 넘은 지금은 돌아 보면, 삶 이란 것이 그렇게 별 다른 것 같지가 않고 가치를 부여 한다는 것이 무의미 해 보인다, 건강하고, 주위에 사람이 넉넉하여, 삶이 풍성 한 사람이 조와 보인다. 과연 돈 많고 유명 하다고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인간미가 없고 풋풋함이 없는 사람을 보면 왼지 어디에 가치관을 두고 사는지 마치 텅 빈 삶 같아 보인다, 그리고 이제 늙어서 너무 바쁘게, 쫓겨 다니는 삶을 보면 애틋함 까지 느낀다. 이제서야 나이가 들어 철이 낳는지 사람 냄새가 좋고, 오가는 반가움이 좋고, 부유함 보다는 함께 나눔이 조와 보인다. 성공해서 바쁜 자식보다, 가끔씩 안부를 묻고 찾아와서 함께 식사하는 자식이 더 뿌듯하다. 물론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고 속 썩이는 자식이 없어서 하는 넋두리 일 수도 있다.
나도 이제 나이가 한국나이로 77세가 된다 예전에는 77이면 오래 살았다고 축하도 하고 특별 event도 하고 친지들이 모여 축하도 하고 하였지만 이제는 100세 시대가 되어 85은 넘어야 노인 대우를 받는다. 그러니 나는 아직도 노년 초년병에 불과하다. 이제는 남은 생을 어떻게, 어떠한 가치관으로 살아야 할지가 큰 숙제다. 그동안은 Retire하면 제 2의 삶으로 무언 가를 해야만 하는 Pressure 속에서, 붓글씨, 동양화, 새로운 악기 ( 대금, Clarinet)도 배워보고, 사진 공부 ( Camera, 후 보정, 다양한 사진 기술)도 해보고 정말로 바쁘게 몇 년을 보내며 나는 정말로 Retirement life를 즐긴다고 생각했고 노력 하였었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니 마치 최면에 걸렸던 것 같다. 4년전에 wife가 자궁암 초기라 수술을 받고 의사의 권유로 chemo 치료를 받았는데 그 후유증으로 몸이 많이 쇠약 해 졌고 Platelet이 정상치로 돌아오지 않아 면역 체계에 이상이 생기며 Emergency를 수시로 드나 들다가, Kidney에 이상이 생겨 더욱 쇠약 해졌고, 2021 년10월에는 병원에 한달이상 입원해 있었고, LUPUS병이라는 진단을 받고 퇴원 해12월 초부터 치료를 시작했다. 이 병은 일종에 면역체계의 반란으로 자신의 면역체계가 자신의 Organ을 공격해 상하게 하는 이상한 병이라고 한다. 우선 몸의 활력을 주는 Steroid를 투약하며 정도에 따라 양을 조절 하는데, 초기라 많은 양으로 신체에 우선 Energy를 키워야 했는데, 이약은 갈증을 유발해 자꾸 단것을 마시는 욕구를 일으켰고, 처음에는 wife가 달라는 데로 cola, pop circle, 수박 등 많이 주어 마셨는데 12월31일 저녁 식사 후 갑자기 Seizure를 일으켜 Ambulance차를 불러 Emergency병원에 입원 했다. 당 수치가 30을 넘어서 그런 현상이 일어났다고 했고, Insulin 주사를 놓아 당 수치를 낮추어 안정을 찾았으나 이제는 당뇨라는 병도 추가가 되었다. 그리고는 2022년 1월 한달간 매주 한 번씩Lupus 치료를 했다. 그후로 Lupus 예방약, Seizure 예방약, 당뇨 주사, Steroid, 혈압 약, Magnesium, Vitamin D, B100, Baking Soda, Anti Biotic, 칼슘 등 수많은 약을 처방 받았다. 이약들을 먹이기 위해 준비하는데 하루에 2시간 정도는 걸린다. 이렇게 나는 wife를 치료하느라 3-4년을 보냈다. 내 삶은 취미 생활이고, Retirement life고, 여행이고, Golf고 모두 중단하고 간호 Mode로 바뀌었다. 여기에 업 친 데 덮치기로 이세상에 Pandemic이 찾아와 Covid 19에방 주사를 주기로 4번씩 맞았고 교회도 닫고, 사람도 서로 격리되어 만나기를 꺼리며 무서워했다. 이렇게 질병이 우리에게 찾아오면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 그저 건강이 최고이고 하루 하루 아프지 않고 잘 먹고, 잘 소화 식히고, 잘 싸고, 잘 자면 행복이고 그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 이상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며, 가치관이 바뀌어진다, 이렇게 사람이 아프면, 예술이고, 취미 생활이고, 다른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다.
이제는 wife하고 동네 한 바퀴 하고, 아침에 건강하게 일어나고, 3끼 식사 잘하고, 화장실 무사히 다녀오면, 우리는 그것에 감사하며 사는 매우 simple한 삶을 살지만 감사하고 있다.
우리는 올해 8월 11일이 우리 결혼 50 주년이 되는 날이라 아이들이 Kingstone 부근 Napanee에 Cottage를 얻어 14식구가 함께 먹고 자며 4박5일을 보냈다. 낚시도 하고, 호수가에서 물놀이도 하고, 아이들은 동물원 구경도 가고, 낮에는 Game도 함께 하고, 식사 시간이면 아이들이 돌아가며 요리 당번을 했는데, Barbeque등 여러 요리를 선보였고 wine도 즐기고, 밤에는 Camp Fire를 하며 손주들과 Marshmallow도 구어 먹으며 보냈고, 우리 기념일 저녁식사는 근처에 있는 Restaurant에서 Stake, Seafood등 요리를 시켜 축하Party도 했다. 이렇게 함께 보내고 그동안 찍어 놓은 사진으로 사진 첩도 만들고 Video도 만들어 추억의 시간을 기념으로 남겼다. 그리고 10월에는 우리 둘만의 50주년 기념 여행을 Montreal로 갔는데 Canada에 와서 처음으로 기차 여행을 9시간반이 걸리는 기차길을 왕복해 2박 3일간 했는데, Montreal 관광도 하고 맛있는 Restaurant에서 Italian, Sea food, Chinese요리등을 즐기며, 오랬 만에 기분 전환 겸 오붓한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이렇게 wife가 건강을 찾아 여행도 하고, Thanks Giving때는 아이들이 우리집에 모여서 한바탕 볶아치다 돌아 갔다. 이제는 손주가 대학생부터 3살짜리 꼬마까지, 끼리끼리 모여 노는 모습들을 보면 그냥 보고만 있어도 대견 해 진다. 아무래도 이 많은 식구들을 먹이려면 끼마다 대 난리지만, 우리집 냉장고의 Drink나, 음식이 독이 나지만 돌아가고 난 후 그것을 채워 놓는 시간들이 즐겁고 능력이 있음을 감사한다. 이렇게 훈훈한 만남이 있어, 살아가는 재미가 아닌가 한다. 이렇게 나는 참 축복받은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