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성찰 2016년 3월 12일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날(B) 때 자신의 의지로 태어 나지 않지만, 또한 죽음(D)이라는 마지막 단계도 또한 자신의 선택대로 되는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 사이의 삶은 어느정도 의지에(C) 의해 선택된 삶을 영유해 간다. 우리는 태어난 환경에 커다란 지배를 받고,또한 성장하는 과정에,교육, 친구와 책들, 신앙생활 등의 영향으로, 그리고 커서는 결혼과 자식들, 직장 생활 속에서 자신들의 철학과 믿음을 만들고, 신념이 자라나, 삶의 선택에 우선 순위와 중요도를 만들고 적용해 살아간다. 그러나 이 삶은 감히 어느 누구도 옳고 그르고, 더 잘 살았다고 평가할 잦대가 없으며, 각자가 다른 삶을 선택(C) 했고, 주어진 여건들이 그렇게 다른 모습으로 허락 해 왔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는 어떻게 삶을 선택하고 살아 왔건 죽는다는 것이다. 종교들은 내세의 평안을, 그리고 영생과 천국을 허락 하지만, 누구도 죽음의 순간을 마지하는 마지막 과정을 편안하고 안락하고 아름다운 죽음을 마지하도록 약속하지 않으며, 어떻게 해야 하는지 가르치지도 않는다. 우리는 주위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며, 정말로 많은 종류의 죽음으로 가는 과정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우리들은 99세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2-3일 만 고통없이 앓다가 저 세상에 주님의 품으로 돌아 가기를 바란다. 아마 100세 시대로 들어온 새 세대는 120세 까지로 변 할지도 모른다. 이 오래 산다는 것은 과연 좋은 일일까? 왜 우리는 오래 살기를 바라는가? 과연 이것이 우리의 소망일까? 우리는 죽음은 인정하지만, 나도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며, 정말로 내가 원하는 죽음의 과정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기를 피한다. 나에게는 아직 조금 여유가 있고 한 20년정도, 아직도 먼 뒷날의 이야기 이고, 언제 닥쳐 올지도 모르는 것을 미리 당겨 상상하며 고민하기를 꺼리는 것이다.
우리 대다수의 사람들은, "죽을때 까지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하며, 자신의 능력으로, 독립적인 삶으로 자신의 일상을 돌보고 살기를 원한다." 이것이 건강한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유지 할 수 있는 건강과 부가 우리의 늙어가는 과정에 필수인 것이다. 오래 살기를 바라기 보다 건강하게 독립적인 삶을 가능한 한 길게 유지 하는 바람을 위해, 정기적인 식사와 운동을 꾸준히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자신의 독립적인 능력이 무너져 내리는 시기가 찾아오며, 그 때에는 자신의 고통과 수치심의 삶을 돌봐 줄 Care Centre에 들어가는 비용을 감당해내기 위한 경제적 능력을 갖춘다, 우리의 소망는그 기간이 짧고, 편안하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누구도 막을 수는 없지만 Manage는 할 수 있고, 시간이 가면서 점점 더 나은 시설과 방법을 찾아가고 연구 하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얼마나 이것을 마지할 준비를 하고 있는 걸까?
우리의 삶은 나만의 것이 아니다. 우리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있는 공동체의 일원 인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서로 사랑하고 친구가 되고 각자가 맡은 역활을하며 살아간다. 이 과정 속에서 내가 사라지는 것이다. 가족들은 나의 죽음에 슬픔과 그리움을 가질것이고 친구들의 아쉬움과 사회에서의 빈 자리가 생긴다. 그러나 이 세상은 나 없이도 아무 이상없이 잘 돌아간다. 그러면 죽음은 왜 심각한 문제 일까? 아마도 우리가 만든 심각함이지, 그저 이 세상에 일어나는 하나의 자연적인 현상으로 보아야 하지 않을까? 모두가 나의 죽음은 잊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일상 생활을 해나갈 것이다. 작은 돌이 수면에 떨어져 작은 물결을 만들지만 곧 사라지듯이 나의 죽음 또한 이 세상의 삶에 한 물결이 었던 것이다.
우리 개인으로 볼 때도 죽음은 이렇게 간단 하고 하나의 현상이므로 받아 들이기에 그리 어렵지 않다. 그러나 질병과 노화와 공포는 다르다, 단지 우리가 감내 해야 하는 상실에 대한 두려움 만이 아니라, 고립과 소외에 대한 공포이기도 하다. 우리들은 자신의 삶이 유한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부터 그다지 많은것을 원하지 않는다. 돈을 더 바라지도, 권력을 더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가능한 한 이 세상에서 자기 삶의 이야기를 쓸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에 대해 직접 선택하고 자신의 우선순위에 따라 다른 사람이나 세상과의 연결 고리를 유지 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심각한 질병을 갖고있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생명을 연장 하는것 말고도 해야 할 중요한 일들이 많이있다. 고통을 피하고, 가족 및 친구들과의 관계를 더 돈독히하고, 주변과 상황을 자각할 수 있는 정신적 능력을 잃지 않고, 타인에게 짐이 되지 않고 자신의 삶이 완결 됐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요즈음 의사들과 주위의 사람들은 이러한 사실들을 얼마나 알고 이해 하고 있는지 모른다. 의사들의 가장 중요한 과제는 환자들이 그들을 압도하는 불안감에 잘 대처 하도록 돕는 것이다. 죽음에 관한 불안감,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불안감, 돈에 대한 불안감등 말이다. 의사는 환자와 그 가족이 X나 Y중 어떤 치료법을 원하는지 알기위해 거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마음의 결정을 하기전 환자를 보호하기 위해 꼭 물어야 할 질문은; 병의 예후를 어떻게 이해 하고 있는지? 앞으로 일어날 무엇이 염려 스러운지? 기꺼이 희생할 용의가 있는 것이 무었인지? 건강이 더 악화되면 시간을 어떻게 보내고 싶은지? 스스로 결정을 내리지 못 할 상황에 이르면 누구에게 그걸 대신 하게 할 것인지? 등 말이다. 그리고 우리도 각자 이 질문에 어떠한 대답을 어떻게 해야 할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한다. 왜냐 하면 우리가 피 할 수 없는 언제 닥처 올지 모른는 사실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받아 들여야 한다. 그래야 자신이 이 상황에 처 했을때 당황하지 않고 대처 할 수 있다. 우리는 마지막에 대처하는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혼자 설 수 없는 순간이 틀림없이 찾아온다. 언젠가는 우리 몸의 쇠락은 덩굴이 자라나는 것 처럼 진행이 된다. 그리고 한 순간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린다. 이 모든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인 것이다. 어느 할머니 처럼 자다가 슬그머니 돌아 가셨다는 소망을 가지고, 나도 그렇게 죽음을 마지하게 해달라며, 기도 하지만, 이것은 극히 소수의 사람 에게만 오는 축복이다. 그 망상 속에 준비 없이 당황하는, 그리고 고통속에서 동물원의 짐승처럼 타락된 Senior home의 중환자 실에서 쓸쓸하고 외로운 마지막의 시간들을 보내려고 하지 않는 다면 말이다. 우리는 모두 자유의 상실을 하지 않는, 나만의 ‘Home’에서 지내기를 소망하며, Senior Home으로 옮겨옴으로 포기 할 수 밖에 없었던 것들이 무엇인지에 대해 전혀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리고 의사들은 이 상태에 처한 노인 들이 잘 살아가도록 : 중요한 관계와 기쁨을 어떻게 하면 유지 할 수 있는지를 돕는것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은 듯 하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질병과 노화 죽음에 따르는 여러가지 시련은 의학적인 관심사로 다뤄져 왔다. 인간의 욕구에 대한 깊은 이해보다, 기술적인 전문성에 더 가치를 두는 사람들에게 우리 운명을 맡기는 일종의 사회 공학적 실험 이었다. 그 실험은 실패 했다.
이제는 누군가에게 의존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사람들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유지 하도록 돕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최대한 자신의 영역과 주권이 주워진 주거 지역을 만들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되 항상 옆에 의료진과 간호사에 의해 본인이 원하고 필요시에 항상 도움을 줄 수있는 독립적인 삶을 존중한 주거지와 service의 노인 들의 공간을 ' Assisted Living Concepts' 라 한다. 이 concepts은 윌슨이 남편과 함께 어머니의 문제를 배려해 시작한 성공적인 Senior Home 이 었고 초기엔 누구도 이해가 되지 않아 어려움으로 시작 했지만 막상 짖고 나니 매우 성공적인 인기 속에 2차 준공을 했다. 그리고는 계속해 증축이 필요했고 돈이 필요 했다, 그래서 회사를 상장해 Wall Street에서 자금을 끌어 드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이 소문이 퍼지자 너도나도 같은 Concept으로 우후죽순 같이 노인 요양원으로 만들며, 노인을 위한 시설이 아니라 돈벌이 하는 institution으로 전락해 버렸고 Wilson이 만든 요양원도 주주들의 거센 반발에 초심의 노인을 위한집에서 가족이나 요양원이 원하는 이익의 집단으로 탈락해 버렸다. 그래서 Wilson은 주식을 모두 넘기고 나올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돈으로 어머니의 이름을 딴 ' 제시 F 리처드슨' 이라는 제단을 만들어 노인을 돌보는 일을 탈바꿈하는 일을 계속하고 있다.
또한 토머스 체이스는 젊은 의사로써 처음으로 요양원에 부임 했을때, 그 곳은 생명이 모두 사라진 늙고 시들은 불구자 들의 집단이었다. 치매와 지팽이 없이는 걷지도 못하고, 간호원들은 그들을 돌보는 일들을 하나의 직업적인 의무로 생각 했고, 고통과 죽음 사이에서 죽음의 날만을 기다리는 반시체 들이었다. 그래서 그는 고통 스러웠고, 이 속에 생명을 다시 불어 넣어, 죽는 그 순간 까지 좀더 삶의 가치를 잃지 않는, 인간의 고귀한 삶의 장소로 탈바꿈 해야 겠다는 의지 속에, 이 곳을 개혁 하자는 혁명을 이르켰다. 즉 외부의 생명체를 이 곳에 투입해 그들과 함께 생명력을 되 찾자는 것이었다. 개들과 고양이를 키웠고 각방에 카나리아 새를 주워 함께 살도록 했으며, 채소밭을 만들고, 모든 Artificial flower들을 진짜로 바꾸어 가꾸도록 했다. 이사건 후에 생명들이 되살아 나기 시작 했으며, 약처방이 줄어들고, 사망율이 현저히 줄어 들었다. 이렇틋 인간은 어떤 대의에 가치를 부여하고 그것을 위해 희생 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는다는 것이 증명이 된 셈이다.
이 두가지 사실들만 보더라도 우리는 질병과 죽음의 닥아옴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대처하는 방법은 가능하며 좀더 마지막 순간까지 존엄을 잃지 않고 유지하며, 마지막에는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를 통해 편안 하고 고통이 없는 이별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이렇게 삶과 죽음을 성찰해 보면서 이제 70을 맞이한 나의 삶의 Map속에 그동안 지나온 발 자취를 바라보며 좀더 잘살아 올걸 하는 바보같은 물음은 사라졌고, 앞으로의 삶의 그림을 어떻게 그리고 그 자취를 지켜 나가기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하며 계획표를 만들어 가야 겠다.
우선은 건강을 유지 하기위해 적절한 식사(Balance Diet)를 그리고 정규적인 운동, 그리고 사람들과의 소통과 사회 활동을 그리고 소명을 위한 일(스스로를 넘어서는 대의의 추구)을 찾는 작업을 시작 해야 겠다 : 노인을 돕는일, 고아나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일, 방향을 잃고 방황하는 젊은 이들을 돕기, 자연의 파괴를 막는일, 자연의 보호 ( 동물, 식물, 기타)등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때가 오면 내가 맞이할 마지막의 존엄성과 수치를 어떻게 받아 들일 것인가? 어떠한 용기를 내야 할까? 하나는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을 받아 들이는 것, 이것은 무얼 두려워 하고 무얼 희망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실을 찾으려는 용기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찾아낸 진실을 토대로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용기이다. 문제는 어떠한 것이 현명한 길인지 알기 어려울 때가 너무도 많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의 두려움과 희망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한지를 판단 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식들과 대화를 통해, 종말이 가까이 오면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 해야 한다. 책임이 그들에게로 넘어가는 시점이 온 그때 이미 그 순간에 대처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 생이 마감된 후에 모든 사람들이 후훼없이 떠나가고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인생은 시작이 반이면, 이 순간 또한 반을 차지 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삶의 자취와 추억은 우리 속에 남아 있는 사랑의 자취 뿐이며 그것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잊혀 지고 마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라 했던가 … !!